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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Im Jul 11. 2021

오이와 캔맥주

사랑은 사실 정말이지 사소하다


‘기억나? 하굣길에 네가 교복 입고 비닐봉지에 달랑달랑 씽하 맥주 한 캔씩 사다 줬었는데…’ 


오랜만에 엄마와 둘이 하는 데이트에 첫 코스로 현지인이 운영한다는 태국 음식점을 갔다. 영등포 골목 안에 있는 작은 음식점에는 태국 청년이 홀로 작은 주방과 4개의 테이블이 있는 홀을 오가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엄마, 여기 씽하 있다. 오랜만에 한잔?’ 살짝 고민하던 게 무색하게 하얀 바탕에 금빛 사자가 그려진 맥주캔이 놓이자 엄마의 얼굴이 금세 배시시 피었다.




엄마는 술을 좋아했다. 한 모금만 마셔도 온몸이 새빨개지는 우리 부녀와 달리 맥주는 배가 불러 안 마시고, 양주는 소다를 왜 타냐며 스트레이트로 마실 정도로. 어쩌다 한 번씩 어린 우리 남매를 사촌오빠에게 맡기고 친구들과 호프집을 다녀온 다음날이면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엄마와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반찬이 가득 차려진 아침상이 있었다.


태국에서 보낸 6여 년간 더운 날씨에 마시는 맥주 첫 입이 제일 달다고 했다. 유명한 태국 맥주들 중에서도 유독 도수가 높아 남들은 기피하는 ‘비어 씽’을 진해서 좋다며 고집했던 엄마. 


태생적으로 마르고 저혈압인 엄마는 몸을 많이 쓰는 날이면 얼굴이 유독 창백해 지곤 했는데, 그런 날이면 나는 하굣길에 동네 슈퍼에 들러 비어 씽을 한 캔 집었다.




외국인이어서였을까, 아니면 누가 봐도 엄마 심부름하는 아이로 보여서였을까. 학교 이름과 마크가 곱게 자수 놓아진 교복을 입고 비음 잔뜩 섞인 태국어로 인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맥주를 사는 나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손톱에 걸리면 바로 찢어질 것만 같은 싸구려 비닐봉지에 내가 먹을 과자와 엄마에게 줄 작은 캔 하나를 넣어 주었다. 


마치 대학생들 전공책만큼 무거운 영어 교과서들을 턱까지 쌓아 올려 품에 안아 들고, 나머지 한 손에는 하얀 비닐봉지를 들고 달랑달랑 흔들며 콘도를 가로지르는 구불구불한 산책길을 따라 집으로 올라갔다. 


‘아이, 뭘 또 사 왔어~’ 엄마는 20년 전 그때도, 태국 식당에 앉아있는 오늘도 맥주를 사양한다. 약간의 부추김 끝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마시고 나면 엄마의 얼굴에는 혈색이 돌고, 그 바알 간 얼굴에 나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이상한 안도감이 든다. 항상 차분한 엄마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지면 나도 덩달아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며 태국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낸다. 




엄마와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여니 야채 칸 한구석에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오이 다섯 개가 보인다. 가시가 돋아있고 빼빼 마른 청오이 말고 연한 연둣빛이 도는 귀여운 백오이들. 잔뜩 물을 머금고 특유의 싱그러운 풋내에 여름이 느껴지는 오이들.


‘언제 장을 보고 온 거지… 무거운데 같이 가지 꼭 혼자 간단 말이야.’ 속상하면서도 언젠가부터 냉장고 안 오이를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육식 파인 가족들 중에 유일하게 야채를 달고 사는 나. 누가 토끼띠 아니랄까 봐 밥상에 꼭 잎채소와 오이가 있어야 하는 나 때문에 엄마는 장을 볼 때마다 잊지 않고 오이를 사다가 넣어둔다.


까만 시장 비닐봉지에 담긴 오이를 보면 어릴 때 캔맥주를 사다 날랐던 내가 보이고, 그 안에 숨어있는 작은 마음이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상대가 맛있게 먹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가는 뿌듯한 마음. 




오이와 캔맥주처럼 누군가를 위한 사랑은 그렇게 거창하지만은 않다. ‘길을 지나다가 네가 생각나서 샀어.’ 라며 툭 건네는 액세서리와, ‘이거 저번에 먹고 싶다 하지 않았어?’ 지나치듯 한 말을 용케 기억하고 사온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빵집의 타르트처럼. 


우리는 그렇게 작은 것에 위로받고 따뜻해진다. 사랑은 사실 정말이지 사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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