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우려와 걱정, 질투를 뒤로하고 교문을 들어서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니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그냥 평범하게 키웠어야 했는데 그때 왜 월반이란 걸 했는지 후회가 됐다. 가방을 메고 걸어 들어가는 아이를 멀찍이 서서 바라보고 있자니 지난 세월이 눈앞에 필름 감기듯 도르르 지나갔다.
아이의 엄마는 결혼을 하고서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온갖 구박은 다 받았더랬다. 그 시절에는 그게 여자의 탓이었다. 새벽마다 백일기도를 하며 겨우겨우 가진 아이였는데, 유치원 선생님이 또래보다 똑똑하다고 했을 때 오로지 총명한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게 현실이 되었구나 싶은 마음에 망설임도 없이 월반을 택했었다. 적어도 자신처럼 멍청한 선택은 하지 않게 해야지 싶은 생각에 제발 현명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는데, 그게 실현된 것 같았다.
아이의 엄마는 울산에서 상경하여 서울에서 음대를 졸업하고 소프라노로 활동했다. 아이의 아빠는 63 빌딩에서 전산 쪽 일을 했는데, 대졸인 줄 알았지만 결혼하고 보니 고졸이었다. 고졸인 게 문제 될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만 속였을까 싶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매달 갖다 주는 월급봉투는 얇기만 했고 혼자 버는 쥐꼬리만 한 봉급으로 어머니와 두 형까지 먹여 살리고 있었다. 시어머니라는 사람은 굶을지언정 목에는 금 목걸이를 두르고 화투패를 끼고 살며 손에서 담배를 놓지 않는 사람이었고 두 형님들은 사업에 실패해 막내에게 기생하는 사람들이었다.
결혼 후 분가는커녕, 시댁 식구들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 때문에 오페라 가수의 꿈을 접고 고등학교 음악교사로 전향했다. 교직이수를 해놓은 게 신의 한 수였다. 아이의 아빠는 자신이 돈을 많이 벌어 이태리로 유학 보내주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당시에는 쌀독에 쌀을 채울 걱정이 더 급했다.
친정엄마가 결혼을 뜯어말릴 때 귀 기울였어야 하는 것을. 역시 어른들의 말씀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뼈에 새기며 살아가기를 몇 년째, 없는 살림에도 그녀는 매일 출근하는 남편에게 지폐 한 장 건네며 어디 가서 기죽지 말고 제대로 된 밥 챙겨 먹으라고 당부하곤 했다. 그러고는 자신은 일주일 내내 라면으로 버텼고 몸무게는 언제나 40킬로를 넘기지 못했다.
방 하나짜리 집에 시어머니와 두 형님까지 모여 사는데 아이가 생길 리가 있겠냐만은 시집와서 애도 못 낳냐는 시어머니의 구박에 그녀는 새벽마다 절에 가서 기도를 했다. 제발 총명한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100일 기도가 끝나던 무렵, 바라고 바라던 아이가 생겼고 입덧 때문에 생전 먹고 싶지도 않았던 고기가 먹고 싶어 비싼 가격에 덜덜 떨며 고기 한 덩이를 사들고 집에 갔다. 고기를 굽기 시작하니 남편의 형님이라는 사람들이 고기 냄새를 맡고 달려들더니 한 점도 건네지 않고 싹 먹어치워 버렸었다.
뱃속에 있는 아이의 태동을 느꼈을 때 아이의 아빠에게 한번 만져보라고 했다가 아이 아빠의 입에서 "어우 징그러!" 하는 말을 들었다. 알아듣기라도 한 듯 발길질이 멈춘 아이처럼 그녀의 심장도 멈춘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의 영향인지 아이는 태어나서도 아빠의 품에 안기기만 하면 경기하듯 울었다.
아이가 태어나니 더욱더 빨리 이 담배 소굴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안정적이었지만 박봉이었던 교사직을 그만두었다. 이렇게 해서는 입에 풀칠만 할 뿐 어떠한 시작도 불가능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전에는 아이를 업은 채 양쪽 어깨에 수십 종류의 밀폐용기를 짊어지고 타파웨어 방문판매를 다니고, 오후에는 작은 피아노 교습소를 열어 갓난쟁이 아이를 한 팔로 안은 채 피아노를 두들기며 겨우겨우 돈을 모아 단칸방으로 분가했다.
영업사원의 역할도, 원장님의 역할도 잘 해내던 그녀는 몇 년이 흘러 교습소에서 학원으로 키워나갈 수 있었고 아파트 두 채에 자가용까지 가진 넉넉한 사정이 되었다. 사정이 나아지긴 했는지, 남편이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는 사업을 하겠다고 나서서 두 번의 사업실패 속에 겨우 일군 재산이 반토막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함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었고 첫 아이 출산 이후 4년 만에 둘째도 태어났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가 불어닥친 월반 이야기에 그때는 그게 한 줄기 희망처럼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게 일 년마다 이사를 다녀야 하는 상황을 만들고 유급이 목을 죄어오게 되는 상황을 만들다니... 여자가 엄마가 되기 위해 얼마나 더 독해질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앞으로는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더 악착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새롭게 다니게 될 학교 바로 길 건너에 음악학원을 개원했고 하교 종소리가 들리면 창문으로 아이가 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혹시라도 딴 길로 새지는 않나, 학교 앞 문방구에서 노닥거리지는 않나, 바로 하교하지 않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지는 않나 매일 지켜보았다.
아이는 하교하자마자 학원에 들러 엄마에게 눈도장을 찍고 혼자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집전화로 엄마에게 전화하고 책상에 앉아서 학교 숙제를 하고 있으면 국어, 수학, 영어, 한자, 논술, 속독, 악기 등 과외선생님들이 시간 맞춰 방문했다.
처음에는 그 학년을 버텨내기 위해 시작했던 것들이 점차 1등이 아니면 안 되게끔 바뀌었고 잘하는 것은 잘해서, 못하는 것은 못해서 더 가르치게 되었다. 가진 것 없는 아이의 아빠가 아이에게 물려준 재산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끈기와 성실함이었는데 그 덕분에 아이는 시키면 시키는 만큼 성실하게 따라와 줬다. 만약 안 하겠다고 떼를 쓰거나 못 따라와 주는 아이였다면 애초에 포기했을 것인데 아이는 잘 훈련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주었고 아이의 엄마는 매번 조금만 더 가자며 계속 채찍질을 해댔다.
아이의 엄마는 또래보다 어린아이가 혹시라도 밉보일까 봐 학교에서 맡을 수 있는 역할은 모두 맡았다. 아이의 이모는 녹색어머니회 회장, 아이의 엄마는 총무로 활동하며 어머니회를 이끌었고 일 년에도 몇 번씩 아이의 학급에 아이스크림, 햄버거, 학용품 등을 돌리며 학교를 들락날락했다.
오후에는 60평 규모의 음악학원을 운영하고 저녁과 주말에는 틈틈이 소프라노 활동을 병행했다. 아이 아빠의 변변찮은 수입으로는 교육비는커녕 생활비도 되지 않았고, 아이의 엄마가 실질적인 가장이었기 때문에 일을 쉴 수는 없었고 그저 시간을 더 쪼개고 쪼개서 모든 일을 해야만 했다.
밤 11시에 집으로 출근한 아이의 엄마는 냉장고 속에 반찬통과 간식 통을 채웠고 각 통마다 라벨을 붙여 아이가 스스로 꺼내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두었다. 처음에는 아이의 아빠에게 아이들의 저녁식사만이라도 챙겨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러나 그는 내내 라면만 끓여먹이거나 집 근처 치킨집에서 치킨을 사주고 애써 만들어 놓은 반찬은 쉬어서 버리게 했다. 밥솥에서 밥을 푸는 것조차 번거롭고, 차려 먹이는 것은 더 귀찮고, 먹고 나면 설거지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후로부터는 8살인 아이를 붙들고 가르쳤다. 반찬통마다 라벨지를 붙여서 어떤 반찬인지 써놓고 빨리 상하는 반찬 순서대로 숫자를 적어서 그 순서대로 먹도록 알려주었다. 저녁시간이 되어 선생님 로테이션이 끝난 아이는 반찬 통에서 반찬을 덜어서 접시에 나눠 담고 밥솥에서 밥을 세 공기 떠서 수저를 준비한 뒤 동생과 아빠를 불러 저녁을 차려 먹었다.
가족 모두가 잠든 시간, 뒤늦게 쌓인 설거지를 마친 아이의 엄마는 대충 화장을 지우고 아이의 책가방을 열어 알림장을 확인했다. 아이의 노트를 꺼내 숙제가 모두 끝났는지 확인을 한 뒤 내일 필요한 준비물이 제대로 챙겨졌는지 살펴보고 그제야 자는 아이들의 얼굴을 한 번씩 쓰다듬어주고는 침대로 향했다. 고작 하루에 4시간만이 그녀가 눈을 감고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마저도 불면증에 시달리기 일쑤였고 어둠이 걷히는걸 벌건 눈으로 수도 없이 지켜봐야 했다.
하루는 아이의 엄마가 퇴근해 자고 있는 아이의 가방 속을 살펴보니 숙제가 덜 되어있었다. 아마 늦게 오는 엄마가 미처 확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대충 했으리라. 아이의 엄마는 7시에 일어나는 아이를 해도 뜨지 않은 5시에 깨웠다. 아이에게 잠도 깰 겸 씻고 학교 갈 준비를 다 하고 책상에 앉으라고 일러둔 뒤 아침식사 준비를 했다. 아이의 엄마는 소파에서 겨우 두어 시간 몸을 뉘이다 일어나야 했지만 그래도 숙제를 덜 해가서 '이래서 조기입학은 안된다니까'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지난번에는 열이 펄펄 나는 아이에게 해열제를 먹이며 쓰러져도 학교에서 쓰러져야 한다고 청군 백군 머리띠를 물에 적셔 아이의 머리에 둘러주고 등교시키지 않았던가. 그 정도의 각오로 유급을 면해야 했고, 그러려면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마냥 새벽 어스름 속에 군말 없이 책상에 앉은 아이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아이는 혹독한 엄마의 채찍질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경주마처럼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