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말이 빠르고 영어도 빨리 배우는 걸로 보아 언어에 감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고 뭐든 말하는 직업에 맞게 투자해야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쯤 한자 수업과 연계하여 중국어 과외를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아이가 장차 외교관이나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이는 그 유명한 하버드나 아이비리그쯤은 갈 수 있을 거라는 큰 꿈을 꾸었고 아이에게 너는 장차 이 나라를 빛낼 사람이 될 것이라고 주문처럼 말하곤 했다.
그런 비전을 갖고 시작한 중국어 수업을 한지 일 년쯤 되었을 때 선생님은 아이의 엄마에게 방학 때 중국에 연수를 보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아이의 엄마는 그 길로 중국에 연고를 찾아 나섰다. 아이의 엄마는 해외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는 지인에게 중국에 있는 한국 교민에게 다리를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북경에서 생활하고 있는 선교사 가족과의 긴 조율 끝에 4학년 겨울방학이 되자마자 아이와 엄마는 중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2000년 겨울.
제주도는 가봤다고는 하지만 기억이 없고, 북경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내 첫 비행이었다. 내가 내내 손에 쥐고 있던 초록빛 여권 안쪽에는 홀로그램 하나 없이 밋밋한 중국 비자가 붙어있었고 도장이 쾅쾅 찍혀있었다. 중국에 도착했을 때는 시끄럽고 낯선 사람들 가운데 점잖게 차려입은 선교사 가족이 엄마와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12월의 북경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수준의 매서운 추위였다. 도로에는 매연 냄새가 가득했고 천안문 거리에는 주먹만 한 석탄 덩어리가 이리저리 치이며 굴러다녔다.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모든 시민이 하던 일을 멈추고 광장 한가운데에 높이 솟아있는 중국 국기를 향해 가슴에 손을 얹었고, 같이 따라 하지 않으면 중국 공안이 다가와 삼단봉 같은 걸로 내 손을 가리키며 올리라고 했다. 그때만큼은 모두가 시간을 멈추고 국기가 내려오는 장면을 바라보아야 했다.
선교사 가족의 집에 도착하니 바닥난방이 없고 오직 벽에 붙은 라디에이터가 전부라 바닥이 냉골이었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잘 때 양말을 신고 자봤다. 엄마는 다른 빨래는 내놓아도 여자라면 속옷만큼은 직접 빨아야 한다며 날 화장실 세면대로 데려갔다.
수도꼭지를 비틀어 물을 틀자 녹물인지 구정물인지 모를 누런 물이 쏟아져 나왔고 우리는 둘 다 할 말을 잃고 한참 동안 물을 흘려보냈다. 그 누런 물에 속옷을 팍팍 치대며 빠는 방법을 배우며 평소보다 굳게 닫힌 엄마의 입술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내 착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모두가 잠든 시간, 엄마는 기다란 지갑 하나를 내게 건네며 안에 가득 든 돈뭉치를 꺼내 보였다. 버스 토큰처럼 손바닥만 한 작은 지폐부터, 만 원짜리만큼 큰 지폐를 골고루 보여주며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꺼내서 쓰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비닐로 싸인 얇은 플라스틱 카드 여러 개를 펼쳐 보이며 엄마한테 토요일마다 전화를 하라고 했고 수첩에 전화 거는 방법을 적어주었다.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나자 엄마는 한국으로 돌아갔고 나는 그 방에 홀로 남았다.
곧 5학년이 될 나이지만 내 중국어 수준은 딱 유아 수준이라 북경 시내에 있는 유치원 5세 반에서 한 달 동안 같이 생활해보기로 이야기가 되어있었고 선교사 가족은 나를 차에 태워 유치원에 데려다주었다. 처음 제대로 마주한 중국인은 같은 반이 될 아이들과 선생님이었는데, 그들의 뺨은 교과서에서 봤던 북한 어린이들처럼 추위에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교실 바닥은 지어지다만 공사판 바닥처럼 시멘트 바닥이어서 그 위에 얹어진 책걸상은 아무리 자리를 바꿔봐도 흔들리지 않는 위치를 찾기 힘들어 이내 포기해야 했다.
점심시간에는 아이 한 명은 들어갈법한 크기의 큰 솥에 배추 죽 같은 음식이 들어있었는데 그때 그런 음식을 매일같이 먹고나서부터 죽을 싫어하게 됐다. 제일 맛있었던 점심메뉴는 찐빵이었다. 얼굴크기만 한 큰 찐빵 속에 정체모를 것들이 잔뜩 들어있었지만 맛은 가장 먹을만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낮잠시간이 되면 마치 군인이라도 된 것처럼 나무로 된 평상 위에 올라가 각자 이불을 펴고 낮잠을 잤다.
유치원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자유시간이었지만 그런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어 자유시간에는 뭘 해야 자유로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문제집도, 선생님도, 숙제도 없었고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닫힌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는 그냥 한국에서 가져온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러다 처음 외출을 한 곳은 사모님을 따라간 교회였다. 엄마와 나는 어릴 때부터 절에 다녔는데, 나는 어떤 믿음을 가지기엔 아직 어린 나이였고 그냥 엄마가 가자고 하니 따라가는 정도여서 특정 종교에 크기 치우쳐있진 않았다. 사모님이 데려간 교회는 외국인 교회였고 모든 예배가 영어로 진행되어 그 나름의 경험도 색달랐다.
어느 날 사모님이 같이 갈 데가 있다며 그 교회에서 본 적이 있는 자매님 한 분과 찻집인지 술집인지 모를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치마 양 옆이 골반까지 찢어져있는 중국옷을 입은 언니들이 높은 구두를 신고 돌아다녔고 그 언니들 말고 여자라고는 우리 셋 밖에 없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수십 개의 눈이 우리를 향하며 정적이 흘렀지만 사모님은 개의치 않고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사모님과 자매님은 두 손을 모으고 알 수 없는 말로 한참 동안 기도를 했고 사탄에 빠져 타락한 여인들과 사람들을 구원해달라는 말이 뜨문뜨문 들렸다. 나는 그동안 창문 밖에서 빨갛고 반질반질한 꼬치를 파는 아저씨를 멍하니 구경했다. 그곳에서 한참을 기도한 후 사모님과 자매님은 근처에 사당 같은 곳을 가리키며 그쪽으로 향했고 나도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 사당은 입구에서부터 생전 처음 맡아보는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창문이 없어 어두컴컴하고 습했다. 사당 안에는 유리로 된 커다란 관이 있었고 그 안에는 말라비틀어진 여인의 모습을 한 미라가 뉘어져 있었다. 사모님과 자매님은 그 관 주변을 빙빙 돌며 알 수 없는 말의 기도를 시작했고 나는 그 미라에게 홀리듯 유리관에 코를 박고 한참을 살펴보았다.
설명문을 대강 읽어보니 중국의 사막 어딘가에서 발견된 귀족 여인의 미라였다. 아마도 장거리 이동을 하다가 낙오되었거나 모래바람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사막에 남겨진 자였을 것이다. 그녀는 다 헐어버린 천조각을 군데군데 두르고 있었고 허벅지까지 긴 머리칼은 금속 장신구로 곱게 묶여있었다. 모든 장기는 말라서 쪼그라들고 피부조직은 뼈에 바짝 들러붙어 모공 하나하나까지 보였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냄새와 알 수 없는 기도문을 뒤로하고 나 혼자 사당에서 먼저 나와 아까 봤던 빨간 꼬치 하나를 사 먹었다. 천년 동안 썩은 듯한 냄새를 맡은 후에 먹는 탕후루는 지금까지도 내 인생 최고의 탕후루다.
한 번은 선교사 사모님을 따라 집 근처 시장에 가봤는데 거기서 얇은 대나무 꼬치에 고기를 꽂아 탁탁 튀는 불에 구워서 파는 것을 보고는 돈을 꺼내 사 먹어보았다. 그때부터 내 일과는 혼자 그 시장에 가서 그 꼬치를 한 아름 사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절반을 먹어치우는 것이었고 동네 사람들도 매일 출근도장 찍는 나를 알아보고는 내가 매일 먹는 게 양꼬치라고 알려주며 해바라기씨 같은 각종 씨앗류, 건과일 등 이것저것 신기한 음식들을 공짜로 맛 보여줬다. 나는 그들과 길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하나씩 받아먹으며 하오츨! 하오츨! 맛있다고 엄지를 들어 보였고 동네 사람들은 그걸 보고 까르르 웃었다.
한 달 동안 마치 돌쟁이 아기가 된 양 어른들만 졸졸 따라다니면 됐다. 공부할 것도, 별다른 일과표도 없었고 무엇보다 엄마에게 시간마다 보고 전화를 하지 않아도 됐다. 선교사 부부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도록 했는데 이내 그게 자유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 종일 책을 끼고 누워만 있을 수도 있고, 밖에 나가 먹고 싶은걸 모두 다 사 먹을 수도 있으니 그게 자유가 아니면 무엇이 자유였을까.
그때부터는 왠지 모르게 광명을 찾은 듯했고 결국 엄마에게 전화해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처음으로 떼를 썼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엄마든, 집이든, 학교든, 그리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의 연수기간이 두 달로 늘어났고 선교사 부부는 내 손을 잡고 현지 대사관에 데려가 내 여권에 비자 한 장을 더 붙여줬다.
오지 않기를 바랐던 2월 말이 되자 나는 공항에서 선교사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어느 승무원의 손에 맡겨졌다. 그 승무원은 내 목에 UM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적힌 명찰 같은 것을 씌워주었고, 엄마랑 중국에 올 때 앉았던 자리와는 다르게 훨씬 크고 넓은 자리에 앉혀주었다. 중간중간 먹거리와 마실거리를 챙겨주기도 하고 유치한 색칠놀이나 인형 등을 선물로 주었지만 그 모든 게 좋았다.
비행이 끝나자 다른 승객들이 짐을 챙기는 동안 그 승무원은 나를 문 쪽으로 데려갔다. 비행기 문이 요란한 바람소리를 내며 열리자 무전기를 든 직원 두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중국에서부터 함께 비행을 했던 승무원은 나를 그들에게 인계했다. 그 직원들은 골프장 카트 같은 것에 나를 앉히고 내 여권을 받아가서 입국 수속을 도와주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바람을 가르며 공항을 달리는 기분은 마치 내가 유명인사라도 된 듯 특별했다.
뉴스에서 보던 공항 게이트가 열리자 제일 먼저 나온 나를 보고 손을 흔들다 실망하는 표정을 짓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걱정스러운 눈빛의 엄마가 서 있었다. 두 달 만에 보는 엄마와 나 사이에는 왠지 모를 어색함이 흘렀는데 아마도 그게 내 자유의 끝을 알리는 순간이라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