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없었다면 몰라도 있다가 없는 것은 참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럽다. 내가 중국에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자유, 즉 '엄마 없는 삶'에 대한 갈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그동안은 당연했던 일상에 반기를 들고 싶어 졌었다.
왜 나는 그동안 놀이터에서 그네 한 번 타보지 못했던가? 왜 나는 그동안 친구들과 문방구에서 뽑기 한 번을 안 해봤을까? 왜 나는 친구 집에 단 한 번도 놀러 가 본 적이 없을까? 사춘기가 빨리 왔는지 머릿속에는 온통 반란의 씨앗이 될 질문만 떠돌아다녔다. 그 씨앗에 싹을 틔운 것은 학교에서 만난 어떤 선배 언니였다.
중국에서 돌아온 뒤 나는 5학년이 되었고 담임선생님은 나를 그 해 신설된 영어영재반에 추천했다. 담당 선생님과 영어면접을 마치고 받은 합격통보는 엄마에게 또 하나의 희망이 되었겠지만 나에게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여태껏 잘하기만 했지 누구에게 뒤쳐져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 반에서 강적을 만나게 되었으니, 바로 6학년 선배 언니였다.
그 언니는 언제나 나보다 점수가 좋았고, 무엇보다 영어 말하기가 유창했다. 나도 어디 가서 영어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듣던 시절이었는데, 그 언니는 도대체 어디서 배웠길래 저렇게 영어를 잘하는 건지 너무 궁금했다. 참다 참다 어떻게 하면 영어를 그렇게 잘하게 되는지 물어보니 최근에 2년 동안 주재원인 아빠 따라 미국에 가서 살다 왔다는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엄마가 올 때까지 잠도 안 자고 버티며 기다렸다가 왜 우리 아빠는 주재원이 아니냐고 엄마를 붙잡고 펑펑 울었다
그때부터 엄마를 볼 때마다 졸랐다. 미국 가고 싶다, 미국 가면 좋겠다, 미국 가서 살면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하고... 계속 미국 이야기만 했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얼마나 멀리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냥 막연히 미국 가면 영어를 잘하게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엄마를 매일 같이 들들 볶았지만 엄마는 항상 우리가 다 가면 돈은 누가 버냐고 칼 같이 잘랐다. 아빠가 돈을 벌고 엄마랑 가면 되지 않냐고 따졌더니 엄마는 학원 때문에 못 간다고 했다. 아빠도 엄마도 안되면 나 혼자라도 가겠다고 우기니까 동생은 어쩌고 너 혼자 가려고 하냐고 등짝을 세게 얻어맞으면서도 나는 계속 미국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더 이상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뒤돌아서면 미국 이야기를 했고 왜 엄마는 미국에 아는 사람 한 명 없냐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방학 동안 딱 두 달만 다녀와. 조건은 동생을 데려가는 거야. 자매는 떨어져 있으면 소원해져서 안돼.”
조건은 뒷전이고 다녀오란 말에 경사난 듯 집안 곳곳을 뛰어다녔고 목적지가 미국이 아니라 뉴질랜드였지만 어딘들 어떠하리,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 영어를 배우러 떠날 수만 있다면 다 좋았다. 그 해 가을쯤부터 엄마는 영어 과외만 빼고 모든 과외수업을 끊었다. 남은 시간에는 도서관에 가서 뉴질랜드나 영어 관련된 책을 보라고 해서 나는 동생을 데리고 매일 사직도서관과 정독도서관을 버스로 오가며 그런 책들을 뒤졌다.
영어회화 책, 영단어 책, 여행책, 잡지 등 뭐든 닥치는 대로 읽었다. 더불어 더 어릴 적에는 못해봤던 것들을 모두 해봤다. 출출할 때 도서관에서 사 먹었던 컵라면, 오가는 길에 도전했던 달고나 뽑기, 놀이터에서 그네 타기 등 다른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상이었는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그 모든 과정이 일탈같이 설렜다.
엄마는 중국에 다리를 놓아준 선교사님을 통해 또 한 번 뉴질랜드로 가는 길을 마련했다. 그 선교사는 엄마의 후배였고 세계 각지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는데, 한국에 계실 때면 종종 가족끼리 식사도 해서 나도 잘 알던 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은 선교, 엄마는 포교에 뜻을 가진 분이어서 종교로 인한 마찰이 있었을 법도 한데 두 분은 참 돈독했다. 그분이 소개해주셨던 중국의 선교사님 댁에서도 안전하게 잘 지내다 와서 엄마는 이번에도 그분께 부탁했던 같다.
우리가 가게 될 홈스테이는 그 선교사님이 뉴질랜드에 머물 때 잠시 숙식을 제공해주셨던 교민의 집이라고 했다. 현지에서 다이소 같은 달러 스토어를 운영하시는 분들이시고 시골이라서 동네도 안전하고 집도 좋은 데다 부부도 중고등학생 나이의 두 딸이 있어서 우리 자매를 잘 보살펴 줄 거라는 것이다. 엄마는 서둘러 비행기표를 예매했고 나와 동생은 엄마를 따라 뉴질랜드 남섬에 위치한 작은 도시인 더니든으로 떠나게 되었다.
2001년 겨울, 긴 비행시간 끝에 오클랜드에 도착해서 작은 비행기로 환승해야 더니든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겨울이던 서울과는 정반대로 더니든은 한여름이었는데도 햇살이 따가울 뿐 푹푹 찌지는 않고 바람은 시원했다. 공항에 내려 게이트 밖을 나가니 우리를 기다리는 사장님 부부가 있었다.
아저씨는 희끗희끗한 머리에 배 나온 평범한 중년의 모습이었고, 아줌마는 나오기 전 열심히 세팅했을법한 봉긋봉긋한 커트머리를 하고 있었다. 차에 짐을 싣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정말 한적한 시골 풍경이었다. 낮은 전선줄, 나지막한 언덕, 끝없이 펼쳐진 초록 들판에 펼쳐진 마쉬멜로우 같은 통실통실한 양 떼들, 뜨문뜨문 보이는 나무집과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창문을 내려 휘리릭 들어오는 바람을 만져보니 두 번째 외국일 뿐이지만 확실히 그 나라만의 숨결이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동화 속 마을이었다. 구불구불 펼쳐진 작은 도로 왼편으로는 이층 집들이, 도로의 끝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숲이 이어지고 도로의 오른쪽에서는 졸졸졸 흐르는 냇가의 물소리가 들렸다. 평화로움이라는 단어 위에 사진을 붙인다면 내가 봤던 그 풍경이었을 것 같다.
서울에서 살던 동네도 주택이 밀집한 곳이었는데 우리 동네는 고개를 뒤로 젖힐 대로 젖혀야 끝이 보이는 담벼락이 솟은 반면, 그곳의 집들은 하나같이 담이 없었다. 무릎께 오는 장미 덤불이나 꽃들이 집을 한 채 한 채 구분해줄 뿐이었다. 우리가 마주한 집은 누가 봐도 예쁘고 아담한 집이었고, 특히 우리가 쓰게 될 이층에 있는 큰 방은 천장이 지붕을 따라 세모나게 높아서 진짜 외국에 사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 일주일간 엄마는 이것저것 필요한 생필품과 학용품 등을 사주었고 그동안 절대 안 된다고 했던 킥보드도 이곳의 평온함 속에서는 허용이 되었다. 엄마는 한 해 전 중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긴 지갑 속 돈다발을 보여주며 필요한 것들은 아줌마가 다 사주실 거니까 이 돈은 비상금으로 갖고 있으라고 당부하며 한국으로 떠났다. 나는 창 밖에 보이는 파란 하늘을 뚫어져라 보며 또 한 번 얻은 자유의 기회인 만큼 이번에는 누워서 책만 읽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앞으로 내게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는 한치도 내다보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