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내 마음에 동생 한 칸

by 새록

나는 내 결연한 의지와 끈기의 결과로 이 곳에 왔지만, 1학년 짜리 어리버리 동생에게는 그 누구도 의견을 묻지 않았었다. 머리만 크고 철이 덜 든 아이였던 나는 동생을 아끼고 보살펴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엄마가 떠나기 전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이용해 동생을 내 마음대로 휘둘렀다.


"엄마가 없을 때는 언니가 엄마야.”


동생은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 조차도 엄마를 당분간 못 본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우리가 얼마나 먼 곳까지 왔는지 이해하기에는 동생은 너무 어렸었고 눈 뜨면 엄마가 옆에 있을 줄 알았던 것 같다.


“언니, 엄마 언제와?”

“엄마 이제 못봐.”

“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는 침묵만 이어졌고 엄마가 없는 하루, 이틀, 삼일이 지나자 그제야 실감이 났는지 동생은 갑자기 펑펑 울어제꼈다. 우는 동생을 보니 처음에는 시끄러워 짜증이 났고, 그치라는 내 말을 듣지 않아 화가 났다. 그러다 나중에는 나도 같이 엄마가 보고싶어 목 놓아 울었더랬다.


하필 또래보다 말도 늦게 떼고 뭐든지 나랑 반대였던 동생. 어릴적 죽을 고비를 넘기고부터 엄마에게는 살아만 있어줘도 감사한 존재였다. 동생이 제 이름 석자만 바르게 써도 엄마는 두 팔 들고 환호성을 질러 주었고 그 온도는 내가 백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올때와는 사뭇 달랐다.


엉뚱하고 모자란듯 보였던 동생에게는 엄마에게 받은 예술인의 피가 흘렀고 당시 유명한 예술인을 배출하던 리틀엔젤스 예술단에 덜컥 합격하고는 엄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었다. 이제 막 무용을 시작한 꿈나무였는데 한순간에 모든 것을 접고 알파벳도 모르는 채로 그 먼 땅에 와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찍이 엄마품을 떠난 동생은 정서적으로 불안했는지 밤에 자주 지도를 그리곤 했는데, 처음에는 사모님이 별 말 없이 이불을 빨아주곤 했지만 일주일에 서너번 반복되니 화를 내셨다. 군대에서 막내가 잘못하면 선임들이 깨지는 것 처럼, 내가 그 화를 다 받았다.


“동생 교육 좀 잘 시켜!!”


그런 말을 들을때면 나는 동생의 뒷통수를 후려치며 한번만 더 그러면 내쫓아버린다고 협박했다. 나름의 교육이 통했는지 어느날부터는 동생이 밤에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보니 동생은 언니에게 쫓겨나는게 두려워 지도를 그려놓고도 숨겼고, 그대로 이불을 덮어 놓았다가 그 축축한 침대에서 잠을 청하고, 또 잠을 청하며 그렇게 마르고 젖기를 반복했던 침대에서 잤던 것이다. 겨우 8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이번에는 동생이 내 머리를 후려치는 듯이 느껴졌다.


나는 그날 동생이 쓰던 침구를 모두 걷어 샤워부스안에 들고 들어가 샴푸를 뻑뻑 짜서 발로 밟고 손으로 주무르며 땀인지 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흘리며 정신없이 이불을 빨았다. 뜨겁게 차오로는 수증기 사이로 동생의 모습이 희끗희끗 보였지만 차마 눈을 맞출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인채 그저 빨래만 했다. 놀란 사모님이 윗층으로 뛰어올라와 이게 왠 난리냐고 했을 때 나는 그저 주스를 쏟아서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퍽퍽 밟아대며 이불을 빨다가, 욕실 구석에 작아질대로 작아진 동생을 불러 함께 머리에 이불을 이고 마당으로 나갔다. 눈을 감고 더듬어 빨랫줄을 찾아야 할 정도로 눈부신 뙤약볕 아래에 이불을 널고 우리는 그 그림자 속에 숨어 해가 질때까지 한참을 말 없이 앉아있었다.


그 때 동생이 혼자 감당했을 비참함이 내게는 평생 잊어서는 안되는 죄책감이 되어 내 마음에 동생 한 칸을 만들었다. 물론 그 날 이후도 나는 동생을 자주 쥐어박고 지금까지도 대장놀음을 하고 있지만 그때 제대로 살피지 못해 미안하고, 그런 나를 한번도 원망하지 않아주어 고마운 마음이 여태 그 칸에 크게 자리잡고 있다. 어쩌면 이런 잊지 못할 상처들이 쌓이고 쌓여 가족이라는 굳은살이 되고 우리를 단단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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