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어떻든 친구가 되는 과정은 누구나, 어디서나 비슷하다
내가 인터(International School)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난생처음으로 공부에 허덕였다. 뉴질랜드에서는 수학은 배웠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습에 불과했고 그저 제자리걸음만 하다가 인터에서 배우는 수학&과학은 11학년 과정에 맞춰져 있어서 기껏해야 7~8학년 수준인 나로서는 선행도 이런 선행이 없었다. 안 그래도 뼛속까지 수포자인 내게는 고난의 시작이었다.
첫 중간고사 시험에서 받은 28점. 하지만 부끄럽지도 않았다.
'빵점이 아니라니, 신기하군'
당시에는 선생님들도 모두 격려를 하며 네 나이에는 그럴 수 있다며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오히려 미안해하셨지만 나에게는 공감이 아니라 대책이 필요했다. 이대로는 본교로 갈 수 없으니 말이다.
인터에는 한국인 그룹 한 무리가 있었는데, 조기유학 붐이 일기 직전 또는 그 초기에는 아무래도 여자 유학생이 드물었다. 입학 당시 딱 한 명의 한국인 언니가 있었는데 몇 개월 후 전학을 가서 인터에서 한국인 여학생은 내가 유일했다.
많지 않은 숫자의 한국인 무리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미 성인의 나이였음에도 인터-본교 생활을 하고자 유학 온 ‘스무 살 형님’을 필두로 적게는 두 살부터 많게는 일곱 살까지 차이가 나는 오빠들이었다. 아침마다 숙취로 퀭한 사람, 스키니로 교복 바지를 줄인 사람, 시커멓게 수염이 돋은 사람 등 어린 나로서는 접근하기 힘든 존재들이었고 그들은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고 ‘애기’라고 부르며 상대도 안 해줬다. 오히려 중국인, 일본인 언니들이 더 친절했을 정도.
첫 시험 이후 수학 점수는 바닥이었지만 지난 2년의 뉴질랜드 연수 경험으로 영어점수는 당연히 가장 잘 나왔는데, 그러다 보니 그 ‘형님’들과 나는 자연스레 협력관계가 되었다. 나는 영어 숙제를 돕고, 그들은 수학&과학 숙제를 도와주었고 시험기간이 되면 의도치 않게 서로에게 과외선생님이 되어주었다.
난 공부에 도움이 될 재간은 없었지만 아직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어려웠던 그들이 통역이 필요한 경우 내가 동행하며 정신적 의지(?)가 되려고 했었다. 그러다 보니 지극히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영역을 알게 되며 더 진솔한 사이가 됐던 것 같기도 하고.
특히 나를 많이 도와주던 크리스(Chris) & 재민 오빠. 그들은 쉬는 시간이면 자신들의 필기노트와 교과서를 펼쳐놓고 한국말로 설명해주었는데 문제는 내가 한국말도 이해하지 못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었다는 것. 당시의 수학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던 것 같다. (아, 물론 지금까지도...)
그러다 보니 give & take가 분명했던 우리의 관계는 점점 일방향이 되어갔고 시험기간이 되면 7명의 오빠들은 돌아가며 전화기를 붙들고 풀이를 해주고 또 해줬다. 정, 의리, 오기, 사심. 어떤 것이었든지 간에 그들은 나로 인해 전화기 너머에서 밤을 지새운 날이 수도 없이 많았다. 덕분에 그 시기는 내 인생에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장 공부를 열심히 했던 순간으로 기록되었다.
물론 공부만 한건 아니다. 주말이면 그들은 나를 타운(번화가)으로 데려가 카페, 당구, 노래방, 식당 등에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당시에는 엄마가 전화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계속 어울려 다니면 내 머리털을 밀어버리겠다고(?)했지만 걱정하는 바와는 다르게 그들은 나는 으른들의 세상에서부터 철저히 지켜주려고 했던 것 같다. 나중에 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모든 유흥은 나를 해질 녘에 버스에 태워 보내고 나면 시작되었다고…!
이해관계가 딱 맞아서 시작된 관계였지만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며 각자의 사춘기 어린 질풍노도의 시기를 이겨냈고 그 태풍을 함께 견딘 우리는 곧 친구이자 가족 같은 사이라는 걸 알게 됐다. 어쩌면 모든 관계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작이 어땠든, 제일 맏형(?)이 자주 하던 말을 인용하자면,
식구란 게 별거 없어.
같이 밥 먹으면 그게 친구고 식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