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어둠 속에서 지옥 속으로

왜 나는 미움받아야 했을까

by 새록

뉴질랜드에서의 어두운 홈스테이 생활을 청산하고 호주에서 지내게 된 홈스테이 집은 전도사님과 두 남매가 사는 집이었다. 전도사님의 남편은 한국에서 지내는 기러기 부부였고 아들은 대학생, 딸은 고등학생인 집이었다.


처음 호주에 도착했을 때 엄마가 우리 자매를 동행했고 엄마는 아직 어렸던 우리가 교회를 가고 싶어 하면 데려가셔도 좋지만 억지로 종교를 강요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하시며 떠나셨다. 물론 엄마가 떠나던 그 주부터 수요예배, 금요예배, 일요일 등 교회에 따라가야 했다. 교회에 가지 않으면 우리 자매만 집에 남아 쫄쫄 굶거나 컵라면을 먹어야 했으니까.


처음에는 교회라는 곳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여러 종교를 많이 접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스피커가 터져라 찬양을 하고 목사님의 말씀에 오열을 하고 외계어 같은 방언을 터트리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 생소했다. 그리고 왜 내 돈을 헌금 주머니에 넣어야 하는지도 이해가 되질 않았고. 하지만 주일마다 성령의 세례에 비틀거리는 그들 속에 뻣뻣하게 있는 내가 더 외계인 같이 느껴지곤 했다.


평일 저녁때면 청년들이 전도사님 댁에 모여 성경 스터디나 기도회 같은 걸 했다. 밤이 깊은 시각, 열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둥그렇게 무릎을 꿇고 앉아 손에 손을 쥐고 방언으로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모습은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호주 학교에는 런치박스(도시락)를 매일 챙겨가야 하는데, 전도사님이 매일 챙겨주셨던 점심은 버터만 바른 하얀 식빵이었다. 퍽퍽한 빵에 딱딱한 버터가 잘 발리지도 않아 생버터를 씹어먹는 그 느낌은 최악이었다. 교회에 가야 하는 날 저녁에는 식탁 위에 육개장 컵라면을 올려두고 나가셨다. 전도사님이 요리를 하는 모습은 엄마가 계셨던 첫 일주일 말고는 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뉴질랜드 홈스테이도 겪었으니, 이제 먹는 걸로는 그러려니 했다.


전도사님과 함께 살 때는 내가 인터에 다니던 때라서 시험기간만 되면 선배 오빠들이 돌아가며 전화를 해서 문제를 풀어주고 설명해주곤 하던 때였다. 전도사님은 이런 모습을 보며 어린것이 벌써부터 남자들한테 꼬리 치고 다니는 걸 보니 기도가 많이 필요하다고 했고 나에게 씐 사탄을 떨쳐야 한다며 나를 둥그렇게 앉은 청년들 가운데에 무릎을 꿇게 하고는 그들이 돌아가며 내 머리에 손을 얹고 나를 위해 기도하도록 했다. 내게 씐 사탄은 시험기간에만 나타나는 사탄이어서 오락가락하니 그때마다 그들은 기도가 통했다고 생각했다.

전도사님 본인은 깔끔한 것, 깨끗한 것에 온 신경이 몰두해 있었지만, 정작 나와 내 동생에 대해서는 무신경했다. 한 번은 4학년밖에 되지 않은 내 동생이 학교 스웨터를 잃어버리고 혼날까 봐 아무에게도 말을 안 했던 때가 있다. 늦가을 날씨여서, 아무리 따뜻한 호주라도 10도 정도로 떨어지는 쌀쌀한 날씨인데 매일 반팔 셔츠만 입고 등교하는 게 이상해서 내가 동생에게 스웨터를 입고 다니라고 말을 했는데도 늘 덥다고 괜찮다고 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문제는 학교였다.


담임 선생님이 이 엄동설한(?)에 반팔만 입고 다니는 아이에게 스웨터를 챙겨 오라고 수차례 말해도 오들오들 떨며 필요 없다고 말하는 아이를 수상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 내용은 즉시 교내 외국인 학생 담당 선생님인 마시(Ms.Marcy) 선생님께 보고됐고, 마시선생님은 가디언인 전도사님께 전화를 해서 아이가 이 날씨에 반팔만 입고 등교하는 걸 알고 있는지 물어보았고 내일부터는 스웨터를 꼭 입혀서 보내달라고 전했다.


학교에서 전화가 왔던 그날, 전도사님이 나를 소리 지르며 부르셨고 놀란 동생도 따라서 방으로 들어왔다.


“도대체 어떻게 하고 다니길래 학교에서 전화가 오게 만들어!! 동생이 스웨터를 입고 다니는지 안 입고 다니는지 확인도 안 해? 언니가 돼서 동생이 추운 걸 몰라? 네가 동생을 챙겨야지 남자들이랑 노느라고 동생은 눈에도 안보이지?”


“………….”


“그리고 너는 스웨터를 도대체 어쨌어? 왜 안 입는 건데? 왜 안 입어서 내가 학교에서 전화를 받게 하냐고!”


“……없어졌어요….” 동생이 말했다.


“아니 없어졌으면 없어졌다고 말해야 될 거 아냐! 멍청한 머리는 왜 달고 다니는 건데?”


그 후로 전도사님은 한참을 쉬지 않고 고함을 지르며 훈계를 하셨다.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결론은 나는 꼬리 치는 여우년이고 내 동생은 똥멍청이고. 나는 그동안 단 한마디 하지 않았다. 말을 하면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숨 쉬는 것도 참았다.


“어른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면 잘못했다, 죄송하다, 무릎 꿇고 빌고, 뭔 반성이 있어야 될 거 아니야? 어디 눈 똑바로 뜨고 내 말을 무시해?”


“……………”


“잘못했다고 해! 죄송하다고 하라고!! 무릎 꿇고 빌어!!”


“…………….”


“아니 이래도 말을 안 해? 이게 미쳤나?”


“… 전… 잘못한 게 없어요. 동생이 옷을 안 입고 다니길래 여러 번 물어봤는데 덥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


찰싹-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선생님에게도 맞아보지 않은 내 첫 따귀.




전도사님 댁에 사는 동안 나는 내내 죄인이었다. 나는 내 동생이 하는 여러 가지 실수에 대해 책임을 지어야 했다. 내가 잃어버리지 않은 스웨터, 내가 더럽히지 않은 가방, 하다못해 바닥에 쏟은 물 한잔까지도. 다 내가 동생을 간수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내 잘못이었다. 하필 동생은 다른 아이들보다 더 덜렁거리는 성격이라 매일매일이 사건사고인 것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나중에는 그 집 식구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불행이 내 책임이었다. 전도사님의 남편이 바람난 것도, 아들의 시험성적이 잘 안나온 것도, 딸이 데뷔를 못하는 것도. (딸은 제2의 보아를 꿈꾸며 한국 소속사에 데모테이프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모두 잠들었을 때 전화기를 들어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나 집 옮기고 싶어.”


자다 깨서 받은 듯 한 엄마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뭐? 너 미친 거 아냐?! 엄마는 어쩌라고!”라고 소리를 질렀다. 딸에게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그저 “미친 거 아냐?”로 일축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엄마는 ‘사춘기 딸이 맘대로 하며 살고 싶어서 반항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영어가 안 되는 엄마가 호주 홈스테이 가족들하고 무슨 소통을 하겠냐며, 엄마가 돌아버리는 꼴을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럼 한국인 홈스테이와는 소통이 잘 되었던가요?”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이미 신호는 끊어진 상태였다.


스웨터 사건 이후로 나는 한 달 만에 15킬로의 몸무게가 급격하게 빠졌다. 갑자기 교복이 너무 커져서 내가 치마 허리춤을 머리끈으로 불룩하게 동여매고 다녔었다. 머리카락도 한 주먹씩 빠지곤 했다. 그때쯤 마시선생님의 호출을 받고 그녀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Anything you want to talk to me about, dear?” (얘야, 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니?)


“... No, I’m fine.” (아뇨, 전 괜찮아요)


“You know, you don’t look fine to me. Is there anything I can help you with?” (있잖아, 너 안 괜찮아 보여. 내가 널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까?)


주름진 손으로 내 손을 잡아준 마시선생님의 손길은 그 누구의 손 보다도 부드럽고 따스했다.


그동안 전도사님으로부터 겪었던 많은 질책과 욕, 마음의 상처들이 한순간에 떠오르며 눈물이 터져 나왔다. 마시 선생님은 그동안 내가 싸오던 런치박스의 상태, 급격한 체중변화, 전도사님의 학교상담 거부 등을 주시하고 있었다고 했다. 전도사님이 내 가디언인 만큼 학교도 학생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개입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몇 가지 이야기했고, 마치 내 ‘예스’만 있으면 모든 것은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듯 마시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전화 한 통을 걸어 이렇게 말했다.


Are you ready to save this sweet girl?
(이 착한 아이를 구할 준비가 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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