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던 시절
“엄마, 학교에서 홈스테이 옮기래…”
마시선생님의 통화가 끝나자 나는 그녀의 사무실에서 엄마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누가 네 맘대로 정해라고 했어! 안돼!!!!! 미쳤어? 안.돼.”
“오늘, 지금 바로 옮길 수 있대…”
“이 이기적인 것아 도대체 어쩌자고 이러는 거야?” 엄마는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아마 ‘선생님 좀 바꿔봐’라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고 또 탓하고 계셨을 거다.
“지금 선생님 차로 같이 짐 챙기러 가주신대…”
“그럼 너만 가. 이 나쁜 것아. 너만 가버려!!!! 너만 혼자 잘 먹고 잘 살든지 알아서 해!! 앞으로 나한테 전화도 하지 마!!!!”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무기력함에 고개를 푹 떨궜다.
“Is it a ‘yes’?” (된다고 하시니?) 마시선생님은 발끝만 보고 있던 내 얼굴을 살피며 물어보셨고 나는 보일 듯 말듯하게 끄덕였다. 엄마의 알아서 하라는 말은, 언제나, 하면 죽여버리던지 죽어버리겠다는 암묵적인 협박이지만 그냥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마시 선생님은 알겠다는 듯 수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Hello? Yes, this is the Director of International Student Affairs speaking on behalf of the school. According to the procedures, we are to immediately relocate Miss Choi from your residence and…..” (여보세요? 네, 외국인 학생 담당부서장으로서 학교 입장을 전하고자 전화드립니다. 절차에 따라 댁에서 학생의 거주지를 즉시 옮길 것이며…)
마시선생님의 차를 타고 전도사님 댁으로 가는 길에서 선생님은 내게 몇 가지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다. 네 잘 못이 아니다. 세상에는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너는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한 아이가 아니다. 등등의 말씀을 해주셨지만 이미 돌같이 굳어버린 몸과 마음에는 조금도 와닿지 았았다.
집에 도착하니 전도사님은 댁에 계시지 않았다. 아마도 오후 이 시간쯤이면 교회에 계실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침대 밑에 있던 내 캐리어에 짐을 담기 시작했다. 동생과 함께 쓰던 것들은 남겨두고 내 옷가지와 학용품, 책들을 챙겨 담았다.
마시 선생님은 내 캐리어를 트렁크에 실어주셨고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 출발했다. 그 순간에는 그저 이대로 멀리, 끝없이 어디론가 갈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The family you are going to meet is the Simpsons.” (네가 만나게 될 가족은 ‘심슨 씨네’란다.)
“………..”
“There are two of our girls already living with them, so I wouldn’t worry too much about… what you’ve gone through…” (이미 우리 학교 여학생 두 명이 같이 지내고 있으니 네가 겪어온 일…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
빠르게 지나가는 낯선 풍경을 보며 ‘내가 겪어온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됐다. 보호자라는 이유로 따귀를 때리거나 뒤통수를 후려치던 전도사님과 오빠의 행동들을 그저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이유는 뭐였을까. 타일 바닥에 내쳐지면서도 울기는커녕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나는 그때 무슨 생각으로 그들에게 맞서지 않았던 걸까.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던 작은 오기였을까, 아니면 너무 두려워서 무감각했던 걸까. 나만 이렇게 살았던 걸까, 다들 그렇게 사는데 말하지 않았던 걸까.
“And don’t ever worry about your sister. Her homeroom teacher and I’ll keep our eyes on her at all times and we’ll bring her out if necessary, even without your mom’s consent.” (그리고 네 동생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말거라. 동생의 담임선생님과 내가 항상 지켜보고 있을 거고 필요시 바로 데리고 나올 거야. 엄마의 동의가 없더라도 말이지.)
“…. does my sister know that I’m leaving?” (제가 떠난다는 사실을 동생이 알고 있나요?)
“Not yet, I guess. I’ll have her homeroom teacher to inform her as soon as I get you to the new family.” (아마 아직은 모를 거야. 너를 새로운 집에 데려다주고 나면 내가 동생에게 전해달라고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릴게.)
그렇구나. 동생은 혼자 남겨졌단 사실을 아직 모르는구나. 알게 되면 동생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한글도 떼기 전에 언니 손만 붙잡고 비행기에 타서 이 먼 곳까지 날아왔는데. 그 언니라는 사람은 동생을 혼자 버려두고 저 살길 살려고 떠났다고 생각하겠구나.
스스로 정당화하려던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래도 한편으로는 동생은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째서 내가 타깃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도사님과 그 식구들은 내 동생에게는 손찌검을 하거나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주지는 않았기 때문에... 무엇보다 호주 홈스테이도 괜찮다는 것을 엄마에게 증명시켜 보이면 동생도 조만간 옮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We’re here, at the Simpsons.” (도착했구나, 심슨 씨네 집에.)
마시 선생님이 차를 세우자 잘 가꾸어진 정원 속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층 집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더 이상 따뜻해 보이고 다정한 집의 겉모습에 속지 않기로 다짐했다.
굶어도 좋고
더러워도 좋으니
제발 때리지만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