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내용은 주관적 경험에 의한 것이며 특정 나라 및 문화권 비하의 목적이 아닙니다)
내가 유학 다녀왔다고 하면 백이면 백, 속으로 묻든 대놓고 묻든 ‘부자였나?’라는 질문을 품는다. 물론 내 어린 시절은 유복한 편에 속했지만 나를 포함해 내 유학생 친구들의 부모들은 돈 걱정을 하지 않고 펑펑 쓸 수 있는 부자는 아니었다. 호주에 유학 온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나를 포함해 내 주변 유학생 부모님들의 의사결정 수순은 모두 한결같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빡세게 학원/과외를 돌릴까? (아냐, 애가 무슨 죄야…)
‘유학’ 하면 미국이지! (아냐, 돈이 너무 많이 들어…)
그럼 가깝고 저렴한 필리핀에 보낼까? (아냐, 치안도 걱정이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잖아…)
그럼 호주 아니면 뉴질랜드네!
만약 돈이 진짜 많은 부자였다면 애초에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 우리 이모네가 그랬다. 연예인, 정계인사들과 함께 담장이 하늘을 찌르는 한남동 집에 살고 가정부가 두 명이나 있었던 그 집은 사촌언니를 유학 보낼 때 일말의 고민 없이 뉴욕으로 보냈다. 일 년에 1억이 드는지, 2억이 드는지 계산기를 두드릴 필요가 없는 진짜 부자들은 무조건 미국이나 영국으로 갔다.
더불어 특출 나게 뛰어난 아이들 또한 목적지는 호주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영재학교나 콩쿠르, 올림피아드 같은 곳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장학금을 받으며 미국이나 유럽으로 갔고 여러 이유들로 유학을 택하지 않는 친구들은 한국에 남아 카이스트나 서울대에 조기입학을 하는 경우를 종종 봤다.
호주를 선택한 부모들은 대부분 치열하게 돈을 벌어 내 자식 세대에는 경제적 자유를 이뤄내길 바라는 사람들이었다(어떤 부모든 그렇지 않을까 싶지만). 경제적으로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한국에서 대입을 준비하는 것 보더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싶어 했다. 실제로 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하고 한국으로 대학을 가더라도 영어 하나만으로도 소위 말하는 SKY에 갈 수 있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초에 미국이나 유럽 유학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환율이 배로 더 비쌌으니까.
그래서 전 세계 유학생들을 쭉 줄을 세운다면 어느 면에서나 딱 중간쯤에 있을 법한 사람들이 호주에 있었다. 부를 단순하게 직업으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내가 알고 있던 호주 유학생의 부모들은 대부분 대기업 회사원이나 자영업자(학원, 요식업 등)인 경우가 많았다. 의사, 교수, 변호사 등 전문직부터는 더 무리를 해서라도 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엄마 피셜)
나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으로 유학 간 사촌언니와 유럽으로 유학 간 베프가 있었기에 서로 다른 나라의 분위기(?)를 자주 공유하곤 했는데, 희한하게도 각 지역마다 유학생들의 목표(goal)가 달랐다. 어디까지나 우리 셋의 생각이고 절대 공신력이 있지 않지만 간단히 정리를 해보자면,
[유럽 - 금의환향]
단순히 외국어 때문이 아니라 예술, 기술 등 특정한 목적 달성 후 한국으로 귀국하고자 함
영주권 및 국적 취득 허들이 높아서 이주는 고려 X (단순 커리어-빌딩 용으로는 취직하지만 이후 미국 같은 다른 나라나 한국으로 점프하기 위한 목적)
[미국 - 아메리칸드림]
미국 대학 진학 및 취직을 목표로 함 (잘 안되면 외국인/영어 전형으로 한국으로 진학)
조건만 되면 거의 모두가 영주권 신청을 함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자리 잡음
[호주 - 아메리칸 워너비]
미국 대학 진학이 우선
호주 대학을 진학하더라도 취직은 미국이나 한국으로 함 (전문집단 제외)
귀국하거나 다른 나라로 점프하는 경우가 높고 호주에 남지 않음 (전문집단 제외)
호주뿐만이 아니라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유학하는 유학생들은 미국 대학 진학이 1순위였다. 실제로 내가 다니던 호주 학교에서도 대입시즌이 되면 호주대학, 미국 대학, 한국 대학에 고르게 지원을 하는 편이었고 선택지가 생기면 미국 대학 1순위, 호주대학 2순위, 한국 대학 3순위로 결정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만 그랬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공통적으로 미국에 가고 싶어 했고, 우리에게 호주는 평생 자리잡기 위한 나라가 아니라 정류장 같은 곳이었다. 적어도 미국 대학에서 요구하는 영어실력은 기본으로 갖추게 되고 한국보다 학교 공부가 덜 힘들어서 내신 및 특활(오케스트라, 스포츠 등) 기록을 어필하기 좋고 시간이 여유로우니 TOEFL 및 SAT 준비가 수월했으니까.
주변의 졸업생들을 보면 미국 대학으로 진학하는 케이스는 약 30%, 호주 대학으로 진학하는 케이스는 약 50% (호주대학만 붙었거나 의사, 변호사, 회계사 등 전문직 희망자들), 나머지 20%는 한국(서. 연. 고, 카이스트 등) 대학으로 진학했다. 흥미로운 점은 호주대학에 진학한 50%의 학생들도 졸업 후에 호주에 남는 비율은 적었다는 점이다. 의대나 법대 등에서 전문지식을 취득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아시안들이 선호하는 경제, 경영 등을 전공한 선배들은 다른 나라(미국, 싱가포르, 한국 등)로 이주했다.
영어를 쓰는 많은 나라 중에 왜 호주를 택했는가를 묻는다면, 그건 바로 모든 것이 ‘적당한’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재벌도 아니었고, 천재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적당히 잘 살고 적당히 잘하던 딱 중간에서 살짝 상향점을 향한, 그런 집의 그런 아이였고 부모가 치열하게 벌어 자식에게 더 좋은 기회를 주고 싶어 하는 평범한 집이었기 때문이다.
호주는 나 같은 아이들이 주로 모이는 그런 곳이었다. 물론 절대 일반화할 수는 없고, 호주 유학생 전체를 대변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사다리의 끝에 서울대학교가 있었다면 호주에서는 아이비리그가 있었으니 호주 유학은 결국 더 높은 사다리를 오르기 위한 곳이었던 것 같다.
반대로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던 사촌언니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겪었다고 한다. 언니도 한국에서는 아주 잘 사는 편이었지만 그곳은 또 다른 리그의 사람들이 있었고, ‘꽃보다 남자’에서나 나올법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유학생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았던 것. 그들은 공부(=성공)가 목적이 아니었고 이미 부모세대에서 모든 것을 이루었기에 대대손손 자아실현을 하며 살면 되었다고 했다. 치열하게 대입을 준비하는 자신을 신기하게 보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물론 뉴욕에서도 극히 일부 유학생의 단편적인 이야기이며 대다수는 치열하게 공부하며 살아가는 유학생들이 더 많았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스위스, 독일 등에서 생활했던 내 친구는 당시에 주변에서 한국인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있다면 천재들이었다고 한다. 음악 천재, 수학천재, 축구천재 등 각자의 목표가 뚜렷했고 대부분 여유 있는 집안의 자제들이었지만 현지에서 알아봐 준 ‘재능’ 하나로 장학금을 받아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결과적으로 호주는 한국에서보다는 좀 더 높은 사다리를 오르기 위한 부모의 선택으로 적당한 나라였던 것 같다.
물론 나는 사다리 중간에서 포기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