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쯤 되었을 때 반에 한국인 두 명이 합류했는데, 그들은 점심을 항상 둘이서만 먹었다. 때로는 고등학교로 넘어가서 한국인 언니 오빠들과 함께 교내 매점을 다니기도 했지만 이래나 저래나 결과적으로는 항상 한국인 무리와 어울렸다.
“아니 근데, 호주 애들이랑은 도대체 어떻게 친해지는 거야?” 어느 날 그중 한 명이 내게 물었다.
“친구 사귀는 게 방법이 뭐 별거 있나, 그냥 먼저 인사하면 되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인사를 안 받아주면 어떻게 해? 봐봐, 다 자기들끼리만 밥 먹고, 자기들끼리만 놀잖아.” 한국인 친구가 한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깼다.
“호주애들은 너희가 자기들이랑 안 놀아 주는 걸로 알던데?” 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우리가? 우린 그런 적 없는데?” 친구는 진심으로 당황한 듯 보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현지인들과 한국인들은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해 오해가 쌓이는 중이었다. 호주애들은 호주애들대로 집에 가서 한국애들은 어울리려고 하질 않는다고 할 테고, 한국애들은 한국애들대로 집에 가서 호주애들이 안 놀아주고 차별한다고 했을 것이다.
“아, 주말에 오빠들이랑 시티에 있는 노래방 가기로 했는데 너도 와~!” 친구 중 한 명이 말했다.
“나는 주말에 브리애나(Brianna) 집에서 파자마 파티하기로 했는데…” 나는 괜스레 쭈뼛쭈뼛 말했다.
“넌 왜 한국사람들하고 안 놀아? 영어 잘한다고 콧대 높은 거야 뭐야. 혼자 호주 친구 있어서 좋겠다 좋겠어~~” 드디어. 터질 것이 터졌다.
유학생활을 하다 보면 자주 저울질의 순간이 왔다. 영어와 한국어가 동시에 잘 되는 상황에서도 같은 나라 출신이란 공통점 하나만으로도 더 마음이 편했기에 나도 한국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내적 갈등이 꼭 생겼던 것 같다.
차를 타고 집에 오는 길에 아까의 상황이 다시 생각났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한국인 커뮤니티’는 존재한다. 외국까지 가서 한국사람들이랑 어울려야 하나 싶지만, 때로는 연대가 주는 힘도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어디까지나 타국이고 외국인으로서 그 사회에 젖어드는 개인의 노력 또한 필수적이었다.
호주인들 입장에서는 학교에서 시커먼(?) 머리를 한 사람들 대여섯 명이 모여 알 수 없는 말로 웃고 떠들며 특이한 냄새가 나는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반대로 한국 지하철에서도 외국인 관광객들이 못 알아듣겠는 말로 시끌벅적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면 자연스레 시선이 따라가기 마련이니까.
그 시선의 지속시간과 느끼는 감정은 개인별 차이가 있겠지만 다들 힐끔 보긴 할 거다. 적어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언어는 얼마나 통하는지, 어떤 이유에서 왔는지 등에 대한 정보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현지인들도 이유 없는 거부감보다는 궁금함, 흥미로움 때문에라도 관계 형성이 더 수월했을 수도 있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인종, 피부색, 종교, 장애 등을 막론하고 마찬가지다. 그것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가 있고 이해의 물꼬가 트인 상태라면 결국 다 비슷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있겠지만, 그전까지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나쁠 수도 있다는 최악의 가정을 바탕으로 방어기제가 작동해서 무조건적으로 밀어내기를 하기도 한다.
각자의 상황이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호주인들이 원해서 내가 초청받아 온 게 아니라 내가 원해서 호주에 왔으니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하는 게 더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나를 알지도 못하고 단지 동양인 여자라는 이유로 길 가다가 날계란과 물폭탄을 던진다거나 괜히 발을 걸어 넘어트리고, 자리가 있는데도 없다고 한다거나, 성적인 말이나 폭언을 하기도 하는 묻지마 차별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비단 호주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에 가도 있을법한 일이다. (한국에서 생활한 내 외국인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더라.) 무지하고 극단적인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결국 차별의 시작은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와는 조금 또는 많이 달라 보이는 누군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