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아이들에게 거침없이 지르고 난 뒤 그날 밤 나는 혼자 집에서 이불킥을 했다. 좀 더 또박또박 천천히 말할걸 그랬나? 내 말을 알아듣긴 했을까? 화가 나서 마구 쏟아냈으니 문법을 틀리게 말했을 것 같은 걱정도 들고 급 후회가 몰려왔다.
‘아…. 내일 학교 가기 싫다……’
영어권 국가에서 나름 3년째 유학 중인데, 왜 그놈의 '원어민 발음'이 안될까? 어떻게 하면 그 중국인 교포 낸시(Nancy)처럼 원어민 느낌이 날까? 그럼 나도 여기서 외국인이라고 손가락질당하지 않을 텐데… 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더더욱 영어로 말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러고 나서는 내 발음이 구리다는 것을 알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에이미 사건 이후로는 대놓고 괴롭힘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 ‘잘 나가는 애들’과는 친해질 수 없었는데(아마 그들이 인기 있는 무리여서 더 그랬을 것 같다), 한 번은 그 무리 중 한 명과 그룹프로젝트를 같이 발표하게 된 적이 있었다. 같이 파트를 나눠 발표 연습을 하던 때, 그 금발머리 여자애는 몇 번 불편한 기색을 비치더니 결국 내게 한마디 했다.
“I’m sorry but your pronunciation kinda…. sucks… no offense, but it…does…” (미안한데, 니 발음…. 좀 구려… 악감정은 아닌데, 근데 좀… 그래…)
하…. 이번엔 차별이 아니었고 팩트였다.
그날 집에 와서 엘렌&찰리한테 내 발음이 진짜 구…린지 물어보았는데,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괜찮다고 말해주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괜찮다고 말해준 것이 구리다고 인정해준 것과 다름없었다. 그들의 괜찮다는 의미는 ‘외국인으로서는 괜찮다’였을 뿐이다.
“You wanna know the secret of pronunciation?” (발음의 비밀을 알려줄까?) 찰리가 내게 말했다.
“Yeah, tell me!” (응, 말해줘!)
“Listening well.” (잘 듣는 거야.)
“…..that’s it….? You’re kidding me. I do listen well!” (….그게 다야….? 장난하는 거지? 나 원래 잘 듣거든!) 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No, I mean it! Not hearing but really listening. ” (아냐, 진심이야! 그냥 듣는 게 아니라 정말 잘 듣는 거.)
그래 어디 한번 잘 들어보자. 이번 기회에 영어 발음을 정복해볼 테야!
유명한 미드인 프렌즈를 틀었다. 평소대로라면 쭉 플레이하고 깔깔 웃으며 봤을 시트콤인데 한 문장 한 문장 끊으며 봤다. 당시에는 스크립트를 구할 수도 없어서 일일이 받아 적기를 하며 반복적으로 듣고 따라 하고 듣고 따라 하기를 연습했다. 에피소드 한 편을 다 보는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Have you been listening well?” (그동안 잘 들었어?) 찰리가 와서 물었다.
“Think so but I can’t get my head around some pronunciation, though.” (그런 것 같아, 그런데 어떤 발음은 도저히 모르겠어.)
“Now is the time to watch. You know, seeing and watching is different, right?” (그럼 이제 볼 차례야. 알지, 그냥 보는 거랑 집중해서 보는 거랑은 다르다는 거?)
그 후로부터는 상대방이 말할 때마다 입모양만 보았다. 프렌즈에서 레이첼이 울먹일 때도, 모니카가 화를내며 소리를 지를 때도 그들의 입모양만 주시했다. 그러다가 보았다.
어? d와ㄷ은 같은 /드/ 소리인데 내가 한국말을 할 때랑 다른 위치에서 소리가 나네?
잘 듣고 잘 보라는 말, 결국에는 한국어와 영어의 소리의 차이점을 발견하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나와는 현저히 다른, 원어민만의 소리가 잘 들리면 그 다른 소리를 그들은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 관찰했다. 그리고 거울을 들고 내 입모양과 혀의 움직임을 살폈다.
‘이렇게나 다르니 소리가 다르게 들릴 수밖에.”
한 손에는 거울, 한 손에는 젓가락으로 내 혀의 위치를 맞춰가며 발음을 따라 했다. 오 마이, 단번에 소리가 달라질 수 있다니. 이제 발음하는 습관만 바꾸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