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인종차별을 대하는 자세
맞서야 하는 이유
두 달여간의 방학을 마치고 호주로 돌아와서는 드디어 본교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입학하게 된 반에는 나를 포함해 아시안이 세명이었는데, 한 명은 호주에서 태어난 중국교포여서 외국인이 아니었고, 다른 한 명은 대만 출신의 에이미(Amy)라는 여자아이였는데 나보다 한 살 많아서 8학년에 입학해야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7학년에, 그것도 같은 반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와 안면이 있기도 하고, 나보다 한 학기 먼저 본교로 갔던 에이미와 같은 반이 되어서 나는 내심 좋았다. 그런데 에이미는 나를 보고도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쉬는 시간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내내 영어로 된 소설책만 읽곤 했다.
호주 학교에서는 급식실이 따로 있지 않고 각자 싸온 런치박스(도시락)를 교정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다. 만약 어울리는 무리가 있다면 정말 좋은 방식이었지만, 어울릴 친구가 없는 아이라면 씁쓸한 시간이기도 했다. 삼삼오오 모여 교실을 떠나고 나면 혼자 남아 어디론가 가야 했다. 점심시간 동안은 교실문이 잠기기 때문에.
나도 친구가 없어 교실 근처 풀밭에 앉아 혼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멀리서 에이미가 보였다. 에이미의 손에는 볶음면 같은 것이 담긴 투명한 테익 아웃 용기가 들려있었는데, 그 아이는 뚜껑을 열더니 내용물을 쓰레기통에 와르르 쏟아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키득대던 ‘잘 나가는’ 친구들이 에이미에게 ‘stinky Chinese eating stinky Chinese’(냄새나는 중국인이 냄새나는 중국음식 먹는다)라며 한 마디씩 했고 에이미는 뒤돌아 가버렸다.
쉬는 시간이 되어도 에이미는 책만 읽었다. 에이미는 항상 영어로 된 소설책을 읽었는데, 아까 낄낄대던 무리 중 남자아이 한 명이 에이미의 자리로 오더니 책을 홱 뺏어 들었다.
“Do you even understand this? Just flipping through it, huh?” (이걸 이해하기는 하냐? 그냥 넘기기만 하는거지?) 남자아이는 책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거들먹거렸다.
“………”
“You stinky Chinese! Why are you here if you aren’t gonna talk?” (냄새나는 중국인! 말도 안 할 건데 여기에 왜 있냐?) 그 남자아이의 친구들은 멀찍이서 키득거리며 싸울 테면 싸워보라는 식으로 한 두 마디씩 더 얹기도 했다.
화가 났다. 바닥을 향한 에이미의 텅 빈 눈빛에 나는 더 화가 났다.
그동안 엘렌&찰리의 집에서 지내며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지난 시간 동안 폭력에 맞서지 않았던 내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하곤 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에이미의 눈빛에서 내가 보여서 내가 대신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What the hell! What do you want, Chinese!” (뭐야? 왜 왔어 중국인아!) 그 남자아이는 나에게 쏘아붙였다.
“First of all, I’m not Chinese. I’m Korean. I would be ashamed if I were you, not being able to distinguish the two.” (첫째로, 난 중국사람이 아니야. 난 한국사람이야. 내가 너였다면 두 나라를 구분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부끄러웠을 텐데.) 난 남자아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 다들 황당한 듯 나를 쳐다봤다. 아마 내가 말하는 걸 처음 봐서 그랬을 것이다.
“Second of all, you have no right to bully anyone. Apologize or I’m reporting to Ms Fox.” (두 번째로, 너는 그 누구도 괴롭힐 권리가 없어. 사과하지 않으면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릴 거야.)
나는 누군가에 의해 빙의된 것처럼 말을 쏟아냈다.
“……..” 이번에는 그 남자아이가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I’ve kept quiet not because I can’t talk. I didn’t want to talk to prejudiced and ignorant people like you. You’re not even worth a fight.” (내가 말을 못 해서 조용히 있었던 게 아냐. 너 같이 무지하고 편견이 있는 사람들하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너는 싸울 가치도 없거든.)
마침 울리는 학교 벨소리에 아이들은 불 켜진 방의 바퀴벌레들처럼 후다닥 흩어졌다. 에이미는 끝내 사과를 듣지 못했지만 사과의 말 보다도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걸 보여주었다는 것이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그것도 소위 ‘잘 나가는’ 아이들에게 그랬으니 더욱더 효과적이었다.
내가, 우리가 인종차별에 맞서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나도 그들만큼 그곳에 있을 권리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