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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호 Sep 20. 2017

낫투데이 - 20170920

김치가 먹고 싶다.  

김치가 먹고 싶다.


그것도 젓갈 많이 넣고 양념 진하게 해서 갓 무친 겉절이 김치. 그걸 죽죽 찢어서 흰쌀밥에 올리고 생굴 하나 얹어서 입안 가득 우물거리며 먹을 때 느껴지는 그 입안을 가득 채우는 느낌. 그 향기. 먹고 나서 느껴지는 입안 전체에 감도는 싸한 매운맛.


온 가족이 달려 들어서 하루 종일 고생하면서 김장을 해 치우고 잘 갈무리해 저장할 김치 포기들을 완성한 다음에 절이는 과정에서 떨어진 배추 잎과 (물론 일부는 일부러 뜯어내서 만들기도 한다.) 일부러 살짝 남게 만든 김치 속을 가지고 썩썩 버무리면서 새우도 많이 넣고 굴도 넣어 만드는 겉절이는 오로지 즐길 목적으로 만들어 내는 메뉴라고 볼 수도 있다. 잘 보관해도 김장 한 뒤 이삼 일이면 떨어지게 만들기 마련이고..


그 겉절이를 위해 질 좋은 사태살이나 목살을 사다가 삶아 만든 돼지 수육과 시장에서 사 온 생굴. 김장의 메인 메뉴인 배추김치 말고 부수적인 메뉴로 담기도 하는 돌산 갓으로 만드는 갓김치를 곁들이고, 여기에 맛 좋은 막걸리를 올리면 김장이라는 중노동에 시달린 대가로는 충분한 호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많이 먹으면 그다음 날 아침 지옥의 화장실 문이 열리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위험하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김장의 전통은 꽤 오래된 집안 행사였는데, 큰 누님, 작은 누님 두 분도 우리 집에 모여 같이 김장을 담고 각자 먹을 분량만큼 가져가는 걸로 되어 있었고, 처음에는 배추까지 다 씻고 절이고 했었는데 나중에는 힘드니까 그냥 농협 등에서 제공하는 절인 배추로 만들기도 하는 나름 즐거운 행사였었다. 가급적 노동량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을 하지만 다들 힘든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젓국은 주로 멸치액젓을 쓰는데 김장의 맛은 거의 이 젓국이 좌우한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김치의 시원한 맛을 내기 위해서는 새우젓보다는 생새우를 쓰는 게 좋다. 손가락 두 마디 이상 되는 굵은 새우젓용 새우를 살아 있는 채로 공수를 해서 몇 킬로 씩이나 쏟아붓다시피 하는데 신기한 것은 김치가 익어서 꺼내보면 새우는 거의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진다는 점.


굴은 가급적 굵은 양식 굴보다는 껍질이 좀 씹히고 잘아서 먹기 힘들어도 자연산 굴을 넣는 걸 선호한다. 그 향이 양식 굴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김장을 하고 나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겉절이에 돼지 수육, 생굴과 막걸리를 즐기는 것은 정말로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즐거운 집안 파티가 되기 때문에 매년 빠지지 않고 즐겨 왔는데, 이제 다들 나이가 들어서 슬슬 힘들어하더니 내가 덜컥 병에 걸려버린 작년부터는 모두의 암묵적 동의하에 중단되어 버렸다.


김장도 중단되어 버렸지만 나 자신이 이제 김치를 못 먹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 제일 억울하고 안타깝다.
1차 수술이 끝난 뒤에도 사실 매운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구강을 구성하는 입천정과 윗턱을 반이나 잘라 냈어도 수술 상처가 어지간히 아문 뒤 보철을 장착하고 먹으면 먹을 수 있었다. 그때 수술 후 회복하라고 추어탕까지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방사선 치료 이후 입안 점막이 초토화된 후로는 매운 것은 냄새도 못 맡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우리 사회에서 파는 음식들이 그렇게 맵고 자극적인지 전혀 몰랐다. 하여간 파는 음식은 거의 못 먹게 된다. 진짜 안 매워 보이는 음식들도 마찬가지. 예를 들어 국수 전문점에서 파는 장터국수 같은 것도 알게 모르게 후추 등을 얼마나 집어넣는지, 국물 한 모금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입안에서 불이 나고 만다.


그렇게 구강 점막이 망가져 버린 뒤에 조금씩 회복되어 가면서 가장 절실했던 것도 매운맛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매운 게 좋은 거 아니라는 점을 잘 알면서도 느끼한 음식을 먹은 다음에 상큼한 배추김치 한 조각을 딱 먹으면서 느낄 수 있는 그 시원함이 그리운 건지도 모르겠다.


백김치, 동치미 같은 걸로는 아무리 해도 그 느낌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유일하게 가능한 매운맛이라면 와사비, 그러니까 고추냉이의 매운맛은 먹을 수 있다. 이건 사실 혀의 미각을 자극하는 게 아니라 그 향으로 후각을 자극하는 맛에 가깝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메밀국수를 와사비 푼 장국에 말아먹는 것이 그나마 매운맛에 가까운 자극을 느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메뉴였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참고 견디면서 조금씩 조금씩 회복을 해서 이제 살짝 매운 것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라도 어떻게 조금씩 먹을 수 있는 단계까지 왔는데 덜컥 재발. 2차 수술. 그리고 항암제 투약까지 하고 나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진짜 암담하고 기가 질리는 일이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이게 말로 하면, 뭐 암환자니까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가겠지만 막상 당해보면 정말로 한심하고 답답하며 스스로가 불쌍해지는 경험이다. 김치를 못 먹는다니.. 김치찌개를 못 먹는다니.. 회무침, 홍어무침, 겉절이, 김치속, 매운탕, 고추장에 썩썩 비빈 비빔밥, 얼큰한 부대찌개, 대구뽈찜, 아구찜, 해물찜, 하다못해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오징어 숙회도 못 먹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게 거의 정신적인 고문에 가까운 고통이 되기도 한다.


꿈속에서는 정말 매운 거 많이 먹어 봤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그러다가 잠에서 깨면 더욱 허탈해진다.


통증도 통증이고 어지럼증도 어지럼증이다. 체력이 떨어져서 한 삼십 분만 걸어도 헥헥거리고 가끔 앉았다가 일어서면 빈혈 증상처럼 핑 돌기도 하고, 재발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잠도 못 자는 공포심에 시달리기도 하고,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 생각에 무서워 어쩔 줄 모르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런 거창한 암환자 특유의 고통을 배가 시키는 것은 뜻밖에 먹고 싶은 걸 못 먹는 것 같은, 어찌 보면 소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문제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매운 것만 못 먹는 게 아니라 개구 장애로 인해 못 먹는 음식들이 확 늘어났다. 아주 쉽게 단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오뎅, 그러니까 어묵을 먹는데 납작하고 넓은 오뎅은 먹을 수 있지만 원기둥 형태의 굵은 오뎅은 먹을 수 없다는 뜻이다. 얇은 대패 삼겹은 먹을 수 있지만 두툼하게 썬 목살이나 스테이크는 못 먹는다는 뜻이다. 왜? 그냥 턱이 안 벌어져서 입안에 넣을 수가 없다니까.


매운 걸 못 먹어서 억울한데 겹쳐서 이젠 음식물의 형태까지 가려 가면서 먹어야 하는 상황이라니. 그러면서 뭘 많이 먹고, 많이 먹어서 체중을 늘리고, 체력을 회복하라고? 당신이 한 번 해 보시지 그래?


그냥 다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은 생각만 간절하다.


쓰다 보니 더 짜증이 나네. 어우~ 줸장.



2017.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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