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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고래 Aug 29. 2017

군함도에 위안부가 살았을까

위안부 취재기


"일본에는 위안부 전문기자가 있다. 아사히신문 마쯔이 야요리 기자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위안부 전문기자가 없다. 젊은 기자들이 위안부 취재를 하다가 다른 부서로 발령면 위안부 취재를 멈춘다. 깊이 있는 위안부 기사가 나오기 어렵다."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에무라 기자는 1991년 8월 11일 아사히신문에 '김학순 할머니가 증언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기사화했는데요. 이 때문에 일본 우익에게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알려 국익을 해친 '날조' 기자"라는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이런 말도 하더군요.


"내가 위안부를 취재했을 당시(1991년 경) 한국 기자들도 위안부를 취재했다. 그중 3명을 아는데 모두 여성이다. 이들은 언론계를 떠났다. 한 사람은 외교관, 한 사람은 예술가, 한 사람은 의사가 됐다. 위안부를 취재하다 그만둔 기자가 이 사람들뿐이겠나. 한국의 위안부 전문기자를 만나고 싶다."


저는 듣고만 있을 수 없어서 우리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언론 시장이 어려워지고 있다. 신문 잡지 구독자 수는 물론이고 광고도 줄고 있다. 기자가 특정 주제에 전념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자는 흥미있는 기사도 써야 하고, 광고 기사도 써야 한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현실이 안타깝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던 우에무라 기자가 제 눈을 응시하며 말하더군요.

"진짜 저널리스트라면, 진짜 그 사실을 알리고 싶다면 휴일에 취재하면 되지 않나."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줄기차게 남 탓해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위안부 당사자도 만났고, 위안소 터도 가봤습니다. 위안부 연구회에도 참석했고, 위안부 연구자들도 압니다. 위안부 문제를 알린 미국 하원의원, 일본인 위안부 전문가들도 만났습니다. 위안부 가족도 알고, 우리 정부가 위안부 기록을 얼마나 부실하게 관리하는지 잘 압니다.


하지만 여기까지입니다. 더 취재하지 않았습니다. 위안부에 대해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겁이 났습니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겁이 많거든요. 성인이 된 지금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시사 프로그램은 보지 못합니다. 사실상 위안부 취재는 밥벌이로만 한 거죠.  

 

군함도 위안부 존재요. 당연히 모릅니다. 이정현 씨가 영화 '군함도'에 출현한다고 했을 때 비로소 '군함도에 위안부가 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군(軍, 군대에 동원된) 위안부'만 취재했기 때문에 탄광촌과 같은 산업시설에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군함도 위안부 존재는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을 읽은 뒤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하시마 섬에서 사망한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의 사망진단서, 화장(火葬) 인허증 교부신청서에 그 단서가 나오거든요. 책에는 여성의 실명은 물론 여성의 주소지, 아버지 이름이 적시돼 있지만 저는 그 부분은 빼고 옮기겠습니다.


'여성 노00(본적 황해도 신천군 00면 00리 000번지, 1919년 1월 0일 생, 호주 노 00 씨의 0녀) 씨는 술집의 작부로 일하다, 1937년 6월 27일 1시 0분경 '크레졸(살균과 소독에 사용되는 액체) 음독'으로, 같은 날 3시 20분에 사망했다. 18세의 젊은 나이였다. 동거인이던 혼다 0000(1883년 9월 00일 생)씨가 같은 날 '화장 인허증 하부 신청서'를 제출했다. '(147쪽)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에는 군함도 위안부로 추정되는 인물의 기록이 게재돼 있다.


우리 정부 보고서 '사망 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탄광 강제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실태 기초조사'에도 노00 씨에 관한 대목이 나옵니다.


'하시마에는 여성을 고용한 '요리점'이 1907년부터 있었다고 하며 전시체 제기의 하시마에는 森田, 本田, 吉田(조선인)이 경영하는 세 채의 '요리점'이 있었다는 진술이 있다. 자살한 여성의 화장 인허를 신청한 本田00은 위 진술에 등장하는 本田屋의 경영자로 추정된다.

이 여성의 직업으로 기재된 '작부'에 대한 기록은 나가사키현 탄광사 연표인 炭坑誌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1939년 3월, 우메가사키경찰서는 하시마의 '작부' 27명 중 12인, 다카시마의 '작부' 49명 중 19인을 '무명 작부'로 표창했다. 이 여성은 1938년에 자살하였으므로, 1939년 하시마에 존재한 '작부 27명' 중 조선인 여성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57쪽)  


그 즈음 한 연구자가 메일을 전달해줬습니다.


'군산 학술심포지엄에 재일조선운동사연구회 히구치 유이치 회장이 옵니다. 이 분이 기업 위안소(노무 위안소) 조사팀을 만들어 조사를 시작한 걸로 압니다. 향후 일본의 기업위안소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면 군함도의 조선인 위안부 실체도 파악될 수 있을 겁니다.'     


학술심포지엄은 한일민족문제학회와 일본의 재일조선인사연구회가 공동 개최하는 '한일역사연구자 공동학술회의'를 말하는데요. 올해는 8월 4,5일 군산에서 열린다고 했습니다. 저는 4일 군산으로 향했습니다. 목적지 이당갤러리는 군산버스정류장에서 가까웠습니다. 학자들이 배낭을 메고, 트렁크를 끌고 나타나더군요.


군산 이당갤러리(붉은 색 건물)에서 8월 4일 2017 한일역사연구자 공동학술회의가 열렸다.
일본 학자들이 가지고 온 배낭과 트렁크
한일민족문제학회와 일본의 재일조선인사연구회 연구자들
히구치 유이치 연구자(왼쪽)와 학자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저명한 학자들이 많이 왔다고 하지만 관련 논문을 읽지 않았기에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학회는 오후 1시부터 5시간 동안 이어졌습니다. 쉬는 시간에 산업위안부를 연구하는 히구치 선생님과 명함을 주고받았습니다. 일본인 학자들은 전시 팸플릿을 줬습니다.


고려박물관 관계자가 건네준 '산업위안부 전시' 팸플릿 앞면
고려박물관의 '산업위안부' 전시 팸플릿 뒷면


팸플릿을 자세히 보니 고려박물관이라고 쓰여 있더군요. 학회는 끝났고, 학자들은 한식당으로 이동했습니다. 마침내 히구치 유이치 선생님과 대화할 틈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대화를 시작하려는 순간, 연구자들이 자기소개를 시작했습니다. 버스표를 미리 사둔 터라 저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식당 신발장 앞에서 히구치 선생님과 1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히구치 유이치 연구자.


"산업위안부 연구를 하고 있다. 관련 자료는 찾았지만 연구비가 없어서 자료집은 만들지 못한다. 다만 8월 30일부터 진행되는 전시 도록은 만들었다. 산업위안부에 관한 실증적인 자료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도토리현 지사가 일본 내무성에 '남자 노동자 1000명을 동원했을 때 이들을 위안하기 위해서 여성 20명을 데려왔다'고 보고한 기록이다. 다른 하나는 경시청이 '매춘 영업을 하고 있던 조선 요리점에 이제는 한국에서 동원된 노무자들을 위무하는 역할을 하라'는 통첩을 내린 자료다. 전자는 최근 KBS에 보도됐지만 후자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군 위안부 증언자들은 많다. 하지만 산업위안부 증언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산업위안부라고 커밍아웃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 사실을 정부도 인정하지 않고, 일반인도 모르는 것이다."


더 자세히 듣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은 이틀 후인 "일요일(8월 6일) 밤에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모레(8월 6일) 오전에 선생님을 만나기로 약속하곤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통역이 문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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