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말에도 며칠을 끙끙 앓는 예민한 내가 싫을 때
아직도 선명해요. 새빨간 볼펜으로 적힌 차디찬 네 글자가. 취준생 시절 논술 스터디에서 만난 그는 독설가였어요. 제 답안지를 쓰윽 읽더니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이렇게 적었지요. '용두사미'. 스터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음이 마치 무언가에 데인 것처럼 화끈거리고 쓰라렸어요. 후유증은 오래갔어요. 스터디 전날 잠을 못 잤고 글을 쓸 때도 쿵쿵 심장이 뛰었어요. 이번엔 또 뭐라고 독설을 할까 두려워서요.
이토록 약한 제가 싫었어요. 채점자도 아니고 선배도 아니고 그저 한 지망생의 말에 이렇게 오래 아파하는 제가 한심하다고 생각했어요. '예민하지만 않았다면 훨씬 더 잘 풀렸을 인생'이라고 자조한 적이 많아요. 둔감한 사람들을 '정서적 금수저'라며 질투 섞인 눈으로 바라본 적은 더 많고요. 욕망은 컸는데 그 욕망을 버텨줄 그릇이 너무 물러서 성취 직전에 늘 무너져 내렸고, 그때마다 '욕망하는 나'가 '예민한 나'를 심하게 질책했어요.
그런데 며칠 전 좀 색다른 경험을 했어요. '예민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처음 해본 거예요. 한 대학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어요. 첫 강의 때 저는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을 꺼냈어요.
"누군가의 글을 비판을 할 때는 칭찬과 비판을 1대 1로 꼭 '섞어서' 해주세요. 비판 때문에 글쓰기를 두려워하고, 그러다 결국 이 바닥을 떠나는 친구를 여럿 봤거든요. "
학생들은 약속을 지켜줬어요. "이 부분이 참 좋았는데요, 저 부분은 이렇게 고치면 더 좋을 것 같아요.""이 주제에 공감했어요. 다만 저 부분은 반론이 있을 수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조심스러운 모습.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천천히 단어와 문장을 고르는 신중함이 조용히 강의실에 흐르는더군요. 칭찬과 격려로 말 문을 여니 듣는 사람의 귀도 저절로 열렸고, 그 안으로 비판마저도 순하게 흘러 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칭찬과 비판을 섞어달라는 까다로운 주문 탓에 학생들이 입을 닫을까 봐 걱정했는데 오히려 강의 시간이 부족했을 정도로 모두가 적극적이었고요. 심지어는 수업이 끝나고 한 학생이 또 다른 학생에게 다가가 '이 글이 가장 좋았다'고 수줍게 칭찬을 건네는 모습도 봤어요. 그 모습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내가 예민한 영혼 하나를 구했을지도 몰라.'
둔감한 사람들이 만드는 자극적인 사회보다, 예민한 사람들이 만드는 조심스러운 사회가 더 좋은 사회가 아닐까. 집에 오는 길 그런 생각을 했어요. 둔감한 사람은 자극에 무딘 사람이에요. 때문에 악의 없이 타인에게 자극을 주는 경우가 많아요. 본인이 아무렇지 않았으니, 자신을 기준으로 상대방도 그럴 거라고 예상하는 거예요. 또 상대의 미묘한 표정 변화나 뉘앙스를 잘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에 제때 자극을 멈추지 못할 때도 있어요. 예민한 사람이 상처를 호소하면 둔감한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해요. '난 그런 말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데?' '기분 나빴어? 몰랐네.'
반대로 예민한 사람(HSP·highly sensItive person)은 자극에 크게 반응해요. 본인이 가벼운 자극에도 아프니 남에게 자극을 줄 때도 조심스럽고, 미세한 자극에도 반응성이 높아 타인의 뉘앙스, 표정을 재빨리 읽어내죠. 예민한 사람을 위한 바이블 <센서티브>의 저자 일자 샌드는 이렇게 말해요.
당신(예민한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이입하는 예민한 안테나가 있기에, 당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 그가 느끼는 고통을 같이 느끼게 된다. < p. 129>
실제로 'HSP 셀프 체크리스트'에는 '매우 양심적이다'라는 문항이 빠지지 않아요.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예민한 사람이 둔감한 사람보다 무해( 無害) 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예민함에서 가시를 곤두세운 고슴도치나 선인장을 떠올리지만, 오히려 아무도 밟지 않은 새벽 3시 새하얀 눈밭이 예민함을 더 정확히 표현해요. 지나가는 모든 이의 발자국이 마음에 남는다는 점에서요. 예민함은 '찌르는' 게 아니라 쉽게 '자국나는' 거예요.
예민함이 이토록 따가운 바로여기에 있겠죠. 남들에겐 덜 해로워도 자기 자신에겐 더 해롭거든요. 타인에게 영향받기 쉬운 타입이라 자존감도 낮고 자책하기도 쉬우며 자극에 약해 늘 피로를 호소해요.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예민함 내려놓기'처럼 예민한 사람이 둔감해지도록 도와주는 책들이 이토록 자주 출간되는 이유도 그래서 일거예요.
그러나 어쩌면 예민한 사람을 둔감하게 만들어주는 책보다, 둔감한 사람을 예민하게 만드는 책이 우리 사회에는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HSP 학계는 전 세계 인구의 15~20% 만이 HSP라고 보고 있어요. 그런데도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가시에 찔린다면, 그건 '기질'이 아니라 '과도한 자극'이 문제라는 뜻일 거예요. 그래서 다짐해요. 최소한 제 삶의 반경 안에서는 예민함을 탓하지 않고 둔감함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계속해 보겠다고요. 어쩌다 또 용두사미로 글이 끝나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