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바다 Oct 02. 2022

시인과 평론가, 세대를 뛰어넘은 지적 향연

장정일·한영인,『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

내 인생 처음으로 ‘서평단’이라는 것에 참여하게 됐다. 그런데 인생 최초의 서평단에 처음 쓰는 책도 ‘비평서간집’이라는 생소한 분야다. 잡지나 신문에 실린 개별 글을 가끔 읽을 때는 있지만, 아예 단행본으로 엮어 나온 걸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니 영 자신이 없지만, 서평을 써서 책을 홍보해주는 조건으로 안온북스에서 책을 제공받았으니 밥값은 해야겠지.


‘비평서간집’은 처음이지만 서간집을 읽은 건 내가 기억하는 한 이번이 두 번째다. 두 권 다 올해에 읽었다. 한 권은 이슬아 작가와 남궁인 작가(겸 의사)가 함께 쓴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책이 장정일 시인과 한영인 평론가가 쓴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이다. 그래서인지 서간집 형식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공동 저자 중 한 사람인 장정일 시인은 내겐 시인보다는 비평가나 서평가로 더 친숙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시집은 거의 내지 않았고 한때 소설가로 이름을 알렸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서평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비평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서다. 그래서 이 책이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만남이지만, 이 책에서 단지 문학작품만을 논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철학자 한병철의 저서 『피로사회』와 장일순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이정수 외 저자의 『케이팝의 역사, 100번의 웨이브』 같은 비문학 작품들도 다루고 있었다. 하긴 만일 문학작품만 다루었더라도 다룰 수 있는 주제들은 무궁무진했을 테다. 문학은 시대와 삶과 동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으니까.


62년생에 태어나 84년부터 집필 활동을 시작한 시인 장정일, 84년에 태어나 2014년부터 평론가로 활동한 한영인. 이 책은 이 두 사람이 이메일로 서로의 생각을 나눈 기록이다. 세대를 뛰어넘어 편지로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은 예전에 국사 시간에 배운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그들이 나눈 편지를 내가 읽어본 적도 없고 읽어봤자 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의 대화도 비슷한 느낌 아니었을까.


이황과 기대승의 논쟁은 철학 논쟁이었지만, 장정일과 한영인의 대화는 더 폭넓은 분야에서 이루어진다. 책에서 파생되는 민주주의, 노동, 민족, 문학, 정치 등의 이야기가 풍성하게 전개된다.     


그날 저는 제가 좋아했던 시인들과 최근에 읽은 백무산의 신작 시집과 김혜진의 소설 《9번의 일》(한겨레 출판, 2019)에 대한 소감을 얘기했죠. (…) 그래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인상은 이 작가가 굉장히 진지하게 노동의 의미를 묻고 있다는 것. 노동은 인간의 총체적인 인격 활동인데, 자본은 노동자의 노동이 '임금'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임을 냉정하게 거부합니다. 작가는 이 점을 끈질기게 파고들더군요. (9쪽)    

 

죽음을 무릅쓰고 정의를 위해 법정 투쟁을 중단하지 않았던 미하엘 콜하스, 309일간 크레인 농성을 벌였던 김진숙 지도위원, 성폭행에 가담한 외손자를 고발하는 영화 <시>의 주인공 양미자는 모두 안티고네죠. 이들은 우리가 손가락질받거나 두려워서 하지 못하는 일을 죽음충동에 이끌려 해냅니다. 한마디로 미친 것인데, 미치지 않으면 주체가 될 수 없고, 윤리적이 될 수 없죠.(60쪽)

         

한때는 문화적이고 문학적이 된다는 것이 진보와 해방을 의미했지만 점점 자본과 체제를 구성하는 중요한 행위자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안타까운 것은 '문화의 덫'에 걸린 인간은 분노와 슬픔에 둔감해진다는 거예요. 분노하고 슬퍼할라치면, 문화라는 바셀린 연고가 자본과 기술 문명에 얻어맞고 찢긴 상처에 살포시 내려옵니다. 많은 작가와 예술가가 그 과정에서 '멘토'가 되고 '셀럽'이 되기도 하죠. 이를테면 연쇄살인마가 출현하거나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지면 그걸 소재로 삼은 시와 소설이 등장할뿐더러, 연극이나 영화로도 만들어지죠. (117~118쪽)   

  

한영인과 장정일이 이메일로만 소통한 것만은 아니다. 친분은커녕 태어나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그들은 제주도에서 처음 만났다. 한영인은 제주도에 집이 있었고, (집필 작업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본래 제주도 사람은 아닌 장정일이 마침 우연히 한영인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서 머물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한영인은 친분이 있는 소설가 K를 통해 장정일을 소개받았고 애월에 있는 한 식당에서 처음으로 장정일을 만날 수 있었다.

     

요즘 세상에서는 정말 희귀하겠지만, 장정일이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두 사람은 주로 이메일로 약속을 잡았다. 요즘같이 스마트폰으로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그것은 분명 번거롭고 불편한 일이었겠으나, 이메일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카카오톡에선 담아낼 수 없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덕분에 이 책을 읽는 우리도 두 지식인이 나누는 통찰이 담긴 ‘지적 수다의 향연’이라는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보면 뭐든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다.     


스마트폰을 가진 우리는 서로 실시간으로 언제든 통화할 수 있고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지만, 가끔은 이메일로 소통을 해봐도 좋지 않을까. 안온북스에서 나온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처럼 책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대화는 못하더라도,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마다 우리도 조금씩 깊이가 더해지지 않을까.


(※ 본 독후감은 안온북스에서 책을 제공받고 글쓴이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쓴 글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