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 뉴스레터 <일간 이슬아>로 이번 가녀장 시리즈를 읽으면서 이 글이 어느 장르에 들어갈까 궁금했는데 소설이다. 이슬아 작가의 첫 소설이다.
이번 책의 제목은 『가녀장의 시대』. '가녀장'이라는 이름은 예전에 <님과 함께>라는 가상 연애 프로그램에서 윤정수와 호흡을 맞췄던 김숙의 '가모장' 발언을 연상하게 한다. 그 낱말이 국어사전에 있기는 하지만, 이는 오랫동안 가부장제의 전통이 뿌리내린 나라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가부장'에 대한 통쾌한 미러링이라며 환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과거 우리나라에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어진 '남성호주제'라는 희한한 제도가 있었다. 부계 혈통을 기반으로 한 일원적이고 수직적인 위계 체제였다. 가부장이라는 절대적인 권위자 아래 모든 가족 구성원이 놓여있었다.
자녀들은 물론이고, 배우자인 아내마저도 가부장인 남편에 법적으로 종속되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남편이 아내보다 먼저 죽으면 아들이 가장을 이어받는다는 점이었다. 아들 나이가 아무리 어리더라도.
그런 상황에서 아들이 미성년이면 엄마가 실질적으로 가계를 책임질 수밖에 없는데도 법적인 가장은 어린 아들이었다. 공고했던 가부장제는 IMF 사태를 겪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했고, 2008년에 드디어 '남성호주제'가 완전히 폐지되면서 적어도 제도상에서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이제 가부장제는 문화적으로도 숨을 다해가는데 이처럼 우리 사회가 거쳐 온 사회·문화적 배경을 돌이켜보니, 이슬아 작가가 쓴 첫 소설의 제목에서 '가녀장'이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가 결코 작지 않은듯하다.
이슬아 작가의 실화를 모티브로 한 '픽션'인 소설 『가녀장의 시대』에서 슬아는 '낮잠'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하는 가녀장이다. 슬아가 가녀장인 이유는 (당연한 말이지만) 집안의 경제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딸이기 때문이다. 한때는 자기만의 직업이 있었던 아빠인 웅, 엄마인 복희는 슬아가 사장인 작은 출판사의 직원이다.
제목이 '가녀장의 시대'인 만큼 소설은 주로 슬아와 슬아를 둘러싼 낮잠 출판사의 직원이자 가족의 이야기를 슬아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가끔은 슬아가 아닌 복희가 슬아를 관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편 소설'이라고는 되어있지만 내용이 시간이나 사건 순으로 계속 이어지는 게 아니라, 각각 독립된 에피소드를 한 권으로 엮은 거라서 어느 편을 먼저 읽어도 무방할듯하다. 저자와 편집자가 더 잘 알겠지만, 장편소설이라기보다는 연작소설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앞에서 '가부장제니 '가모장'이니 하면서 거창하게 말을 꺼내긴 했으나, 이 책에서 그런 진지한 주제 의식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가녀장'이라는 어휘에서 내가 혼자 떠올린 감상일 뿐이다. (다만 과거 60~80년대에 오빠나 남동생의 학업을 뒷바라지하고 가족을 전적으로 부양하면서도 가장이 될 수 없었던, 옛날의 공순이 시절을 경험했던 분들께는 감격스러운 호칭이 아닐까.)
이 책은 시트콤을 보듯 편하게 감상하면 된다. 한창 재미나게 읽는 중에 깊이를 발견하게 되는 게 이 작품의 매력이다. 이메일에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도 이미 생각했던 건데, 언젠가 영화나 드라마로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