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한영인,『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
그날 저는 제가 좋아했던 시인들과 최근에 읽은 백무산의 신작 시집과 김혜진의 소설 《9번의 일》(한겨레 출판, 2019)에 대한 소감을 얘기했죠. (…) 그래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인상은 이 작가가 굉장히 진지하게 노동의 의미를 묻고 있다는 것. 노동은 인간의 총체적인 인격 활동인데, 자본은 노동자의 노동이 '임금'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임을 냉정하게 거부합니다. 작가는 이 점을 끈질기게 파고들더군요. (9쪽)
죽음을 무릅쓰고 정의를 위해 법정 투쟁을 중단하지 않았던 미하엘 콜하스, 309일간 크레인 농성을 벌였던 김진숙 지도위원, 성폭행에 가담한 외손자를 고발하는 영화 <시>의 주인공 양미자는 모두 안티고네죠. 이들은 우리가 손가락질받거나 두려워서 하지 못하는 일을 죽음충동에 이끌려 해냅니다. 한마디로 미친 것인데, 미치지 않으면 주체가 될 수 없고, 윤리적이 될 수 없죠.(60쪽)
한때는 문화적이고 문학적이 된다는 것이 진보와 해방을 의미했지만 점점 자본과 체제를 구성하는 중요한 행위자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안타까운 것은 '문화의 덫'에 걸린 인간은 분노와 슬픔에 둔감해진다는 거예요. 분노하고 슬퍼할라치면, 문화라는 바셀린 연고가 자본과 기술 문명에 얻어맞고 찢긴 상처에 살포시 내려옵니다. 많은 작가와 예술가가 그 과정에서 '멘토'가 되고 '셀럽'이 되기도 하죠. 이를테면 연쇄살인마가 출현하거나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지면 그걸 소재로 삼은 시와 소설이 등장할뿐더러, 연극이나 영화로도 만들어지죠. (117~1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