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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 위로 Jun 18. 2022

Day 18: 울 수 있는 용기, 혹은…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 내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최근 힘든 일이 있었다고, 자신이 싫게 느껴질 정도라고 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 앞에서 우는 것의 의미를 가늠해 본다. 어쩌면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혹은 남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 견디기 힘든 순간을 통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분은 어느 쪽이었을까.


문득 몇 년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서울에서 독서 모임에 참석해 근황을 나누던 중이었는데, 외할머니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할머니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어린 시절 나를 가끔 돌봐주셨던 할머니, 편찮으셨던 할아버지 대신 생선을 팔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할머니, 명절 때만 얼굴을 비추는 손자 손녀에게 용돈 주는 걸 낙으로 삼으셨던 할머니. 그런 할머니가 나중에는 내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나를 무너뜨렸다.


그때 나는 감정적으로 취약해져 있었고, 하여 스스로를 괴롭혔다. 독한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고 나서 피우는 담배의 어지러움에 취했다. 몸과 마음이 고장 나기 시작했다. 결국 하던 일을 포함해 사랑해 마지않았던 모든 것을 멈춰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은 안다. 당장 할머니를 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니며, 병의 진행 속도도 환자의 의지와 의사가 처방하는 약으로 늦출 수 있음을. 이제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하셔서 병원에 갈 때 말고는 바깥출입을 전혀 못 하신다. 고향에 내려온 뒤로 더 자주 찾아뵈어야 마땅한데, 서울에서 흘렸던 눈물이 무색하게 몇 달에 한 번 뵈러 갈까 말까다. 이제 할머니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일도, 부끄럽지만 잘 없다.


'눈물 = 약함'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부터 '울지 마'라는 말을 자주 들어 왔다. 특히 걸핏하면 잘 울던 내게 눈물은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우는 것처럼 느껴져 최대한 지양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잘은 안되지만)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어쩔 수 없이 울기 시작했다면 빨리 눈물을 그치고 차분한 상태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슬픔이란 감정도 얼마나 소중한가.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지 못하는 것은 또 얼마나 안타까운가. 하여 지금은 반대로 생각한다.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야 한다고. 속이 후련해질 때까지 펑펑.


오늘 내 앞에서 눈물을 터뜨린 그분이 지금은 좀 나아졌다면 좋겠다. 눈물을 훔치며 "죄송해요"라고 말하던 그 사람에게, 괜찮다고, 더 울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울고 나면 괜찮아지는 순간들이 분명 있으니까. 어쩌면 우리에게는 마음껏 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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