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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koya Jul 09. 2022

쉽게 물러서는 습관

나는 왜 이럴까?

미국 대학원에서 겪었던 일이다. 나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석사를 시작해 나와 6살 정도 어린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들어야 했다. 첫 학기 수업은 대부분 팀 프로젝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협업과 소통을 중시하는 미국 문화에 외국 학생들이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방법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가 나이도 많고 업무 경험도 많다 보니 교수님들의 의도를 빠르게 파악해 팀 프로젝트의 방향이 내 머릿속엔 보다 쉽게 잡히곤 했다. 문제는 경험치가 다른 어린 팀원들은 직접 망해보는(?) 선택지에 이끌렸고, 좀 더 새롭고 도전적인 방향으로 프로젝트를 끌어가고 싶어 했다. 이 상황에서 남은 팀원들을 열심히 설득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프로젝트를 끌고 가는 것도 방법이었겠지만, 프로젝트의 결과보다는 팀원들과 협업하는 경험을 더 중시하는 게 맞겠다 싶어 열정적인 친구들의 의견에 맞춰 나갔다. 


그중에서도 특히 고압적인 태도로 자기 의견을 어필하던 한 친구가 있었는데, 다섯 명이 모두 모여 아이디어를 내고 투표를 하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에는 부정적인 코멘트를 위주로 하고 자신의 아이디어는 왜 특별한지 1시간 가까이 설득을 하는 일이 있었다. 긴 토론 끝에 내가 낸 아이디어와 그 친구의 아이디어가 똑같이 표를 얻었는데, 내가 괜히 먼저 '아 내 아이디어 별로인 것 같으니 네 것으로 가자'라며 기권표를 던져버렸다. 이런 행동을 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일단 순간적으로 원어민을 상대로 영어로 내 의견을 피력하기엔 자신이 없었고, 내 아이디어로 진행하게 되면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싫었다. 다행히 프로젝트는 그럭저럭 마무리되었고, 학기 마지막 날 교수님께서 모든 학생들에게 팀원들의 피드백이 담긴 비밀스러운 서류봉투 하나씩을 나눠주었다. 


전반적으로 나에 대한 피드백이 나쁘지 않았지만 유독 눈에 띄는 코멘트가 하나 있었다. '너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고, 그걸 지지해주는 팀원도 있었는데도 너 스스로 너무 쉽게 포기해버리는 모습이 아쉬웠다'라는 내용이었다. 순간 그동안 내가 쉽게 포기해 버리거나 물러섰던 순간들이 머릿속에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보니 사실 영어실력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갈등을 회피하려는 나의 성향과 낮은 자존감, 그리고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때 괴로웠던 부정적인 과거 경험들이 뒤섞여 일어난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 아이디어나 작업물에 대한 나 스스로의 평가가 늘 박했다. 내가 한 건 늘 별 거 아닌 일이었고, 퀄리티에 상관없이 다른 친구들의 의견이나 작품에 좀 더 박수를 보냈다. 누군가 내 의견에 반박 의견을 내면 난 다시 반박을 해 볼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아, 그럼 네가 말한 대로 하자, 네가 맞다'라며 뒤로 물러서기 일쑤였다. 이런 나의 태도는 너무 오랜 시간 습관처럼 자리 잡아 버렸고,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종종 발생하기 일쑤다. 팀원들이 가볍게 '넌 예스맨이잖아'라고 한 코멘트가 가슴에 콕하고 박혀서 몇 날 며칠을 괴로워했다. 나는 왜 내 의견에 자신이 없을까,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왜 좀 더 밀어붙이지 못하고 빨리 포기할까? 


우선 성향상 난 남들과의 갈등을 극도로 불편해하고 무서워한다. 남들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남을 불편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일할 땐 갈등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남의 눈치를 과하게 보고 남의 비위를 맞추느라 내 에너지를 다 써버리기 일쑤다. 비단 업무 상황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가 이렇다 보니 관계가 피곤하게 느껴지고 나를 점점 잃어버리는 느낌을 자주 받는 편이다.


한국에서의 업무 경험도 한몫을 했는데, 내가 맡은 일에서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했을 때 조직에서 내려오는 엄청난 압박감을 자주 경험했었다. 실패한 프로젝트를 개인의 성장과정으로 이해해 줄 여유가 없는 조직이 많았고, 그렇다 보니 내 의견을 밀어붙여 그 결과에 책임을 진다는 일이 훨씬 더 무겁게 느껴졌다. 미국에선 'Fail Fast' 문화가 있는데, 실패할 거면 빨리 해보고 그 경험에서 무언가 배우고 다음 도전에 성공할 수 있도록 장려한다. 이런 내가 미국 회사에서 어떤 프로젝트든 시작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으니 팀원들도 참 답답하긴 마찬가지.


결과적으로 내 의견에 자신이 없어지다 보니 뭔가 주도적으로 일을 해야 할 때에도 꼭 다른 사람의 컨펌이 있어야만 마음 편히 진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신입이나 대리 정도의 직급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더 높은 연차와 직급에서는 정말 치명적인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수평적으로 일하는 미국 회사에서는 더욱더 큰 문제일 수밖에 없다. 20대 때 깊게 들여다보고 해결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30대가 되니 걷잡을 수 없이 툭툭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24살 친구의 눈에도 훤히 보이는 문제를 33살의 내가 아직도 극복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무기력해질 때가 많다.


최근에 읽기 시작한 'Atomic Habit'을 보면서 조금 용기를 얻었는데, 주요 내용 중 하나가 내가 하는 모든 일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씩만 더 개선한다면 전체적으로 상당히 많이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 성향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무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노력하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요즘엔 의식적으로 갈등 상황이 생겼을 때 좀 더 성숙하고 어른스럽게 대처하려고 노력한다. 마음속으로 '저 사람이 이 일로 나를 싫어하게 돼도 상관없어, 그건 저 사람의 문제야.' 라며 도망가고 싶어 하는 나를 겨우 부여잡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최대한 해본다. 언젠간 다른 사람의 피드백은 수용하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그 결과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결과가 안 좋더라도 좋은 배움의 기회로 삼고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 매일매일 이렇게 조금씩 단단해지고 성장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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