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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koya Jul 17. 2022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그랬어

집안일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나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남편과 함께 유학을 나온 케이스였다. 남편이 먼저 석사를 시작했고, 나는 그 사이에 석사를 지원하기 위한 영어 및 전공 공부를 해야 했다. 그렇다 보니 비교적 시간이 자유로운 내가 집안일을 거의 다 도맡아 하게 되었는데, 이때 집안일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서 결혼 5년 차가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내가 대부분의 집안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아직은 아이가 없어서 집안일 자체가 그리 고되진 않지만 나도 이젠 일을 하기 때문에 예전처럼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기가 어려운 한계치에 도달했고, 최근에야 겨우 집안일 분배에 대한 이야기를 남편과 터놓고 나누기 시작했다.


남편은 상당히 가부장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어서 요리나 설거지에 대한 거부감이 컸고, 장보기와 분리수거를 담당하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빨래는 매일 할 필요는 없으니 생각나는 대로 번갈아가면서 하고, 집 청소도 주말에 한 시간 정도 함께 빠르게 치우기로 합의를 했다. 문제는 집안일의 양이라는 게 명확히 규정하기가 상당히 까다롭다는 것이다. 여기서 규정하기 애매한 부분들을 주로 여성들이 도맡아 하는데, 바로 우리 부부가 그런 케이스이다. 그리고 이 애매한 부분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티도 나지 않아 남편들은 도통 알아채 지를 못한다. 따라서 늘 여성들은 집안일을 더 많이 한다고 생각해 억울한 감정이 드는 일이 많다. (반면 남자는 5:5로 집안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런 상황을 잘 설명해 놓은 만화책 한 권(the Mental Load by Emma)을 발견했는데, 공감 가는 부분들을 정리해서 공유해보려고 한다. 보통 남성들은 자신의 파트너를 집안일을 총괄하는 프로젝트 매니저쯤으로 여긴다. 따라서 자신이 언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여성들이 알려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알려주지 않으면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집안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조율하는 일 자체가 이미 엄청난 시간과 노동력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프로젝트 매니저라는 직업이 왜 있겠나.) 보통 싱크대에 그릇이 쌓여있으면 나는 알아서 설거지를 하는 반면에 남편에게 왜 설거지를 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나한테 하라고 말 안 했잖아?'라는 무책임한 말만 되돌아온다.


이러한 일들을 'Mental Load'라고 부르는데, 이는 해야  일들을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부담이라는 뜻이다. 식기 세척기를 돌리다 보면 세제가  떨어져 가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가 다음 주쯤 주문을 해야 하고, 냉장고를 열어 쥬스를 한잔 마시다가도 내일까지 먹어야 하는 채소들이 뭐가 있나를 기억해야 한다.  일은 정말 끊임없이 일어나고 매우 지치는 일이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식탁을 간단히 정리하다 보면 1시간 동안 집안일을 하고 있는 나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물론 낮에 정리해둬 봤자 다음날 낮이 되면  지저분해져 있지만. 참다 참다 남편에게 빨래  해줘라고 부탁하면 남편은 빨래를 돌리기만 하고  뒤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빨래는 젖은 채로  시간이 지나도록 세탁기에 남아있고, 그걸  내가 발견해  소리를 해야 건조기로 옮겨 담는다. ( 이후는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예상이  거라 짐작한다.)


남편들이 종종 '도움이 필요하면 알려줘'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그랬어'라는 말을 하는 것에는 여성이 부담하고 있는 Mental Load에 대한 부분은 나누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여성들이 이런 일들을 부당함에도 계속에서 도맡아 하고 있는 이유는 여성이 이런 일을 잘할 수 있도록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집안일은 여성이 (엄마가) 하는 게 당연한 문화에서 자랐고, 이러한 영향이 직장 여성이 늘어나는 사회에서도 바뀌지 못하고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되는 순간 이러한 일들은 2배, 3배로 늘어난다.) 따라서 여성들은 낮엔 일하고 밤엔 집안일을 하며 자신의 여가 시간은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된다. 물론 남성들은 '내가 강요한 거 아닌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여성들이 자신의 시간을 포기하더라도 집안일을 더 하는 이유는 '내가 안 하면 온 가족이 고통받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고, 날파리가 집안에 날아다닌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집안일에 대해 남성들이 이해해야 하고 그들도 똑같이 이 가정을 돌보는 데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다시 배워야 한다. 물론 남성도 여성들이 보지 못하는 일들을 혼자 도맡아 하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솔직하게 배우자와 오픈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나는 남편과 이러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음에도 사실 크게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적어도 설거지 정도는 나의 부탁이 없이도 할 수 있는 정도로 달라지긴 했다.) 그래서 지금은 집을 굳이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냉장고에서 야채가 상해서 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죄책감을 갖거나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집이 너저분하더라도 내버려 두고 남편이 스스로 깨닫고 행동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볼 생각이다.  


(그런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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