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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곰인형 30화

그날 밤

by 황규석

좀 한가해진 오후였다. 편의점 카운터에서 핸드폰으로 공무원시험 책을 주문했다.

"하연 씨, 남자친구 있어요?"

점장이 박스를 들고 지나가며 하연의 옆구리를 슬쩍 치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일이 있어서요."

"언제 같이 영화나 보러 가요."


편의점 조끼를 벗은 그녀 하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간단한 목례를 하고 나왔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봄날의 오후였다. 하연이 닭강정 가게에서 포장된 박스를 들고 나왔다. 냄새가 퍼질까 봐 검은 봉지에 한 번 더 담았다. 환승 정류장에서 내렸다. 막 도착한 시외로 가는 빨간 버스에 뛰어올랐다.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버스는 승객이 가득 차 빈자리가 한두 개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봄인가 싶었는데 벌써 여름인가. 좀 덥게 느껴졌다.


버스가 신호정차 후 출발하는데 ‘끼익’하고 급정거를 했다. 출렁하고 승객들이 크게 앞뒤로 움직였다. 기사님이 혀를 찼다. 버스가 다시 움직이자마자 날카로운 경적이 울렸다. 버스가 어두운 길가에 섰다. 버스를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자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체격이 좋은 남자가 올라탔다.


“야! 이 새끼야. 운전 똑바로 못 해?"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당신이 먼저 신호를 어겼잖아"

“뭐! 당신? 이 노인네가 너 진짜 죽고 싶어? 야!”


다짜고짜 멱살을 잡는 남자. 소란스러운 실랑이가 이어졌다. 승객들 모두 본 체 만 체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다. 게임을 하고 이어폰을 듣고 누구 하나 싸움을 말리려 하지 않았다. 씩씩대던 싸움은 곧 끝났다.

하연은 깜박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고 하늘이 흐려졌다. 열린 창문으로 한두 방울 빗방울이 하연의 긴 머릿결에 닿았다. 답답한 마음이 좀 시원해졌다. 소나기가 더 거세게 내렸다.


종점인 공단 입구 삼거리에서 버스를 내린 하연은 비를 피하며 닭강정을 가슴에 꼭 품었다. 아버지의 경비 공장은 조금 더 걸어가야 했다. 코너를 돌자 컨테이너 경비실이 보였다. 그런데 경비실 차단기 옆으로 상향등을 켠 채 멈춘 검은 외제 차가 보였다. 순간 하연은 멈칫거렸다. 아까 버스에 올랐던 그 남자였다.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비를 맞으면서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경비복을 입은 왜소한 체구의 남자는 하연의 아버지였다.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우산을 쓴 남자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노인네 내가 누군지 몰라, 썅! 퍼킹 맨! 갓 뎀."

하연은 얼어붙은 채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일그러진 얼굴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하연은 조용히 뒤로 돌아나갔다.

빗물에 홀딱 젖어 지하 단칸방 집으로 온 하연. 낡은 세탁기에 옷을 넣어 돌렸다. 덜컹덜컹 느리게 돌아갔다. 한참 후 방문이 삐그덕 열렸다.

"아빠 고생하셨어요."

"안 잤니? 피곤할 텐데.”

“된장찌개 끓였어요."


아버지가 수건을 두르고 밥상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고 습관처럼 24시간 뉴스를 듣는다. 벼랑 아래로 떨어져 크게 찌그러진 차를 견인차가 들어 올리고 있다. 경찰차와 구급차가 출동, 도로가 어수선하다. 여자 앵커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렸다.

"사고 소식입니다. 어젯밤 시흥시 공단 외곽도로에서 38살 김 모씨가 운전하는 외제 차가 중앙선을 넘어 차단벽을 뚫고 10미터 언덕 아래로 굴러 운전자가 사망하였습니다. 경찰은 주변 CCTV를 살펴보고 사고 원인을 조사 중입니다. 음주 여부 확인을 위해 시신을 부검하기로 했습니다."


"이게 뭐냐? "

"이거 되게 유명한 상품이에요. 드셔보세요."

하연은 닭강정을 아버지에게 권하고 자신도 다리 하나를 들어 뜯는다.


"하연아, 그런데 너 손이 왜 그래, 어디 다쳤어?"

아버지가 하연의 붕대를 감은 손목을 바라본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삐었어요."

하연은 무표정하게 살을 한 입 물어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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