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이후

그녀를 처음으로 만났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by 황규석

첫 만남, 이후

2월의 하순 토요일 오후의 공기는 평일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행인들도 가볍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대전역 광장을 가로질러 빠르게 걸었다. 설렘과 기대를 안고 기차 예매한 기차표를 다시 확인했다. 기차를 타기 위해 개찰구에 섰을 때까지는 봄기운이 느껴질 만큼 따스한 날씨였다. 기차에 올라타 좌석번호를 확인하고 창가에 앉았다. 군청색의 통일호 빛바랜 열차 시트에서는 독특한 여행의 냄새가 묻어 나왔다. 서울에서 달려온 열차가 잠시 멈추었다가는 기적 소리를 내고 다시 힘차게 출발했다.


얇은 백지에 포장된 호두과자를 하나씩 조심스럽게 입에 살며시 쏙 넣었다. 차갑게 식은 호두과자였지만 호두 알갱이와 단팥이 섞여 단맛이 나와 일을 마치고 피곤했는데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피로를 회복해 주는 당분이 내 몸의 구석구석으로 전달되자 내 몸도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 듯 생생해졌다. 사실 전날 밤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제대 후 복학한 학교에 적응을 못하고 난 다시 어머니가 일하는 도축장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학교는 역시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테두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 어머니와 출근을 했다. 돼지와 소를 도축하면 나오는 피를 가지고 새빨간 선지를 만들고 배달해 주는 일이었다. 역시 먹고사는 일은 역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3시간 후면 내 앞에 등장할 그녀 S에 대한 상상으로 가슴이 쿵쾅거렸다.


나는 누나가 쓰다 준 빛바랜 좀 커다란 구형 마이마이 카세트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용하던 오래된 제품이지만 작동에는 이상이 없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제곡 <A time for us>가 애달프고 간절하게 흘러나왔다.


고등학교 입학 후 겨울인가 흑백텔레비전 “주말의 명화”를 통해 본 흑백의 아름다운 화면 속에서 처음으로 나는 그 주인공을 만났다. 영화를 보던 그때 당연히 나는 로미오가 되고 줄리엣은 당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비련의 연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야산의 나무들과 말라버린 나무와 숲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들의 삶이 곧 영화입니다! 우리 같이 영화세상을 만들어요”라는 내용을 관제엽서에 적어 나는 영화 월간지를 만드는 잡지사에 보냈다.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와 펜팔을 하고 싶었다. 독자 게시판을 운이 좋게 실렸다. 그리고 부산에 사는 S라는 여인이 제일 먼저 편지를 보내왔다. 나보다 한 살 위의 여자였지만 비슷한 또래여서 그녀와 나는 좋아하는 영화도 취향도 비슷했다. 한복집에서 기계로 수를 놓은 일을 한다고 편지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휴학생이고 어머니 일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고전영화도 좋아했다.


비비안 리의 <애수>의 “올드랭 사인” 음악이 나올 때는 고1 때 기말고사를 보기 전날이었다. 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텔레비전으로 명화극장을 보는데 너무 울컥했다. 비비안 리의 그 커다란 사슴 같은 눈망울이 생각나 하마터면 눈물이 ‘톡’하고 떨어질 뻔했다. 그리고 제대 후 본 영화 <택시 드라이버>를 통해서는 사회 부조리와 부적응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감성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시적인 대사와 유화 같았던 영상이 돋보인 프랑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도 우리가 새롭게 좋아하는 영화였다.


그리고 이 영화 이후에 나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고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하천이나 다리를 지날 때 중간에 서서 눈을 감고 영화를 상상하고 합니다. 나를 향해 누군가 달려오는 상상을 하거나 누군가가 오지 않더라도 내가 기다려주는 상상을 하곤 하는 거지요. 주인공인 도시의 부랑자 ‘알렉스’처럼요. 한참을 다리를 서성이는 것입니다. 이곳과 저곳을 끊어지지 않게 연결해 주는 다리에서 나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보곤 해요...”


그녀 S는 내 그 편지 이후 답장이 한참 동안 오지 않아 내 속을 끓이기도 했다. S의 답장은 이랬다. “답장이 늦어서 미안해요. 일이 바빠서 편지를 못썼다고 핑계를 댈게요. 주문이 밀려서 바빴어요. 역시나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히로인인 오드리 헵번의 그 여유로운 하루를 꿈꾸고 있어요. 커피와 샌드위치를 들고 예쁜 옷가게에 앞을 서성이며 느긋하게 걷는.... 그 여유가 참 부러웠어요. 저도 그렇게 여유로웠으면 해요... 언젠가는!”커피와 샌드위치를 들고 예쁜 옷가게를 아이쇼핑하는 자유로움을 꿈꾸고 있다고 했다. 사는 게 힘들지만 말이다. 물론 그녀의 외모뿐만 아니라 나이를 먹으면서도 늘 변함없이 어려운 이웃에게 봉사와 자선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본받고 싶다고 했다.


그녀와 나는 13통 정도의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다. 우리는 비슷한 또래로써 서로에 대한 기대와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가는 샤프펜. 글씨의 미세한 떨림과 지우개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그녀가 나에 대하여 설렘을 가지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그녀도 내가 멋을 내어 쓴 모음과 유독 길게 빼어 쓴 기다란 모음과 자음에서 꽤나 잘 보이려 신경을 쓰고 있음을 단박에 느낄 수 있었으리라.


그녀는 나를 ‘황대장’이라고 불러주었다. “황대장! 그 음악 들었어요... 너무 아름다운 음악이었어요. 나 너무 감동해서 그 음악을 듣고 황대장과 같이 듣고 싶어서 이렇게 전화했어요... 그리고 갑자기 눈물이 났어요,,.” “고마워요... ”황대장, 나 요새 너무 행복해요..” 나는 짐작하지 못하는 척 슬쩍 물어보았다. “왜요?” “아이,, 몰라요,,, 알잖아요.,, 그녀는 진주에서 한복 만드는 일을 놓는 일을 한다고 했다. 섬세한 일을 하는 그녀의 고운 심성이 느껴졌다. 이튿날 전화에서 그녀는 더 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황대장 미워요...” “왜요?” “저 지난주에도 어제도 일하다가 미싱 바늘에 손을 찔릴 뻔했어요. 자꾸 황대장 생각이 나서.... ” “그래서 미워요?” “아니요, 고마워요” “하하 왜 이랬다 저랬다 해요..” “ 왜 이제야 나타났어요, 황대장...” 나는 그녀가 실망을 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저 그냥 평범해요. 당신처럼 영화 좋아하고 그냥 학교 다니다가 쉬는 중이고.. 내세울 게 정말 없어요...” “아니에요. 저는 황대장처럼 공부도 많이 못했고요.. 그냥... 저 보고 실망할까 두려워요. 그런데 우리 다음 주에 만나는 것 맞죠?” “네 그럼요!”


진주역에 기차가 드디어 멈춰 섰다. “끼이이이익...” 그리고 ”덜컹”하고 엔진의 반동과 울림이 전해줘서 모든 승객도 덩달아 흔들거렸다. “왔나!” “어데고? “반갑데이!” 통통 튀는 경상도 억양의 사투리가 새어 나와 내가 경상도에 왔구나 하고 실감케 하였다. 나는 그녀를 만나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인사는 물론 하겠지만 그다음은... 우린 누군가 소개를 해준 것도 아니고 편지를 주고받고 전화를 몇 통 했을 뿐이었다. 서로 영화를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린 서로의 글씨를 통해서 막연하게 모습을 그려보았다. 빈 우체통에 편지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사람들이 진주역 광장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작고 아담한 역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곧 묘령의 여인을 만나리라는 설렘에 나는 머뭇거렸다. 우리는 짐짓 누군가를 찾지 않고 발견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한참을 서성이다가 나를 보고는 환하게 웃는 그녀 S와 서로 눈이 마주쳤다. 나는 좀 두터운 겨울코트를 입고 왔지만 좀 일러도 얇은 봄 외투가 더 어울렸던 날씨였다. 우리는 서로를 발견하고는 부끄러워 짐짓 아무도 보지 못한 듯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어정쩡하게 천천히 다가갔다. 작고 아담한 키의 그녀는 우윳빛 머플러를 두르고 분홍색

핸드백을 어깨에 걸치고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눈을 어디에 둘 줄 몰랐다. “반가워요... 보고 싶었어요. ” “저도요...” “고마워요..” “뭐가요?” “그냥요...” 한참 후에 내가 먼저 말을 이었다.


그녀와 첫 만남이 있은 뒤 26년이 지났다. 나는 이제 쉰 살이 훌쩍 넘었다. 그녀와 첫 만남 이후 그녀와 더 편지를 주고받았다. 내가 사는 대전에서 한번 그녀가 사는 진주에서 두 번 더 만났다. 하지만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더 연결되진 못했다.


나는 늘 언제나 흔들렸고 나의 속모습을 감추기 바빴다. 매사에 우유부단한 나의 잘못이었으리라. 믿음과 확신을 주지 못한 내 성격상 그녀가 나를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 스스로부터 나의 삶부터 이리저리 저울질하려고 들었으니... 온전히 관계의 종말은 내 잘못이었다. 내 탓이다.


중년이 된 S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가 되어 있겠지. 그녀도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을 잊지 않았을까? 영화잡지의 독자 게시판을 통해서 만남이 이루어진 그 영화 같은 첫사랑. 그 그리움 가득한 편지와 떨렸던 첫 만남의 기억들. 지금도 문득 떠오르는 그때의 이름 모를 설렘. 편지로 마을을 전하고 공감하다가 만난 그녀의 수수한 모습과 마주한 그 진주역에서 첫 만남. 어찌 설렘이 있던 자리를 잊을 수가 있을까. 평생 나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있으리라.


그 풋풋했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그러면 더 잘 사랑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기와지붕이 인상 깊었던 작고 아담한 진주역에서의 설렘. 나도 그녀도 이렇게 20대의 풋풋한 사랑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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