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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냐 숙명이냐 그게 문제가 아니로다.

2025년 10월 31일 금요일

by 지우진

부모님이 천주교 신자셔서 어렸을 때부터 성당을 다녔다. 어린 시절, 검은 수단을 펄럭이며 제단 위에 올라가는 신부님이 멋있어 보였다. 미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모습이 각인되었다. 나도 신부님이 되고 싶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여러 번 장래희망이 바뀌었고 부침도 겪었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진학하기로 결정한 곳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신학대학에 입학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입학 통보만 받았을 뿐, 신부님이 되려면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았음에도 이미 어린 시절 꿈이 이루어진 기분이었다. 신부님이 되는 건 나의 운명이라고 확신했다. 할머니 대부터 3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에서 태어난 내가 신부님이 되는 건 숙명이라고까지 여겼다. 가족 모두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입학 후 1년이 채 되지 않아 사라졌다. 신학교 생활을 할수록 신부님이 되어야겠다는 확신이 꺼져갔다. 내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기도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렇게 10년을 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 2학년까지 보내고 일괄적으로 군대를 가는 건 신학교의 규칙이었다. 군대에 있는 2년 여간 고민은 계속 되었다. 전역을 하고 3학년으로 복학한 2011년 3월, 오랜 고민 끝에 신학교를 나왔다.


신학교를 나온 2011년 3월을 시작으로 2015년 10월까지의 기간은, 지오디가 부른 "길" 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이게 정말 나의 길인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지 알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편입을 준비하고 이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활의 연속이었다. 수험생활이 계속 되니 집에 눈치가 보였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끝장을 봐야 했다. 부산에서 공부하다가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동생이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며 자취하고 있었다. 동생 집에서 같이 살며 시험 준비를 했다. 그런데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 공부만 하다가 20대를 다 보낼 것 같아 두려웠다. 내가 왜 신학교를 가서 이 사달이 났는지 자책했다. 동생처럼 그냥 평범한 대학교를 갔으면 학과 수업 들으며 MT도 가고, 동기들과 같이 놀기도 하면서 캠퍼스 생활을 즐겼을텐데. 후회도 많이 했다. 자책과 후회가 계속 되면 무너질까봐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래도 앞이 깜깜하고 깊은 터널 속에 있는 기분을 떨쳐 낼 수 없었다. 답답함이 극에 달할 때면 집 근처에 있는 산에 올라갔다.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그 순간만큼은 잡념이 사라졌다. 오직 나와 산길만 존재했다. 앞만 보고 걸어도 정상에 다다랐고 다시 뒤돌아서 내려오기만 해도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끝 지점이 명확했다. 이 속도로 걸으면 얼마 뒤에 도착할 지도 알 수 있었다. 끝이 어디인지 알고 있으니 길이 가파르고 험하더라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수험생활은 그게 아니었다. 합격을 해야 끝이 나지만, 그렇지 못하면 끝나지 않았다. 내가 최선을 다하더라도 떨어지는 게 시험이다. 떨어지면 방법을 수정해서 다시 도전하더라도 또 떨어질 수 있는 게 시험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떨어지더라도 지난 시험보다는 점수가 조금씩이라도 올랐다는 점이다. 조금만 더하면 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터널의 끝이 보이는 듯 했다. 더이상 자책과 후회도 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더욱 매진했다. 이번 시험에는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와중에 동생이 졸업을 하고 2015년 9월에 취직을 했다. 부산에 취직을 해서 부모님 집으로 내려갔다. 서울에는 나 혼자 남았다. 혼자 남았다고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님 생각은 달랐나보다. 동생도 취직했으니 이제 너도 공부는 그만하고 부산으로 와서 일하라고 하셨다. 나는 조금만 더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만큼 했으니 이제 공부는 그만하자고 하셨다. 자취하는 집의 계약만료 시점이 10월 말이었다. 더 이상 연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묵직한 한 방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부산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이 컸다. 이 길도 또 아닌가, 나는 또 어떤 길을 가야하나, 신학교를 나온 이후 목표로 잡고 달려왔던 이 길을 포기하고 그냥 현실만 생각해서 평소에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분야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야하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결국 현실이 이겼다. 나는 2015년 10월 말에 부산으로 와서 회사에 들어갔다. 이 업종에서 일할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곳이었다. 대우는 나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틈틈이 공부해서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돌이켜보면 이 다짐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냥 돈이나 벌자며 일만 했으면 이룰 수 없었다. 일하고 공부하며 지내는 동안 나보다 5살 위인 형을 만났다.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알고 지낸 지 7개월 쯤 되었을 때, 갑자기 나에게 소개팅을 주선해줬다. 처음엔 미심쩍었다. 본인도 여자친구가 없는데 나한테 왜 해주지 싶었다. 반신반의로 나간 나는 상대방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내가 상상만 했던 이상형이었다. 외모도 외모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확신했다. 좀 더 만나보고 싶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을 놓치면 앞으로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 호감을 느끼지 못했는지 다음날까지 의례적인 답장만 오다가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전에 몇 번의 연애를 했었고, 헤어져도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적은 없다. 하지만 이번 소개팅이 잘되지 않고 끝났을 때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확 식었다. 순식간에 나 혼자 너무 빠졌었나보다. 내가 막연하게 상상만 했던 이상형을 실제로 처음 만났는데, 허무하게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났다는 게 충격이었나보다. 연애가 감정 소모처럼 여겨졌다. 연애에 관심이 사라졌다. 더이상 소개팅 같은 건 받지 않고 일과 공부에만 몰두하자고 다짐했다. 나에게만 더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내가 가는 길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소개팅 후 3주가 지난 11월 중순, 소개팅했던 그녀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예상치 못했다. 그날 이후 어떠한 여지도 남기지 않고 끊겨서 다시 연락이 올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다. 아니, 나에겐 장난이 아니라 축복이었다. 연락이 온 지 이틀 뒤에 우리는 같이 저녁을 먹었다. 소개팅하고 23일 만이었다. 그리고 159일 뒤, 그녀는 나의 아내가 되었다. 지금은 멋지고 의젓한 아들 하나와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 하나를 낳고 9년 가까이 매일 행복을 볶으며 살고 있다.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이라는 말이 있다. 공식적으로 누가 처음 한 말인지는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피할 수 있어도,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피할 수 없다는 의미로 운명과 숙명의 차이를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운명은 노력으로 바꿀 수 있지만, 숙명은 확고하게 정해져 있다는 말로 들린다.


나는 해야하는 숙명과 한 번 정해지면 그대로 쭉 갈 줄 알았던 운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운명과 숙명을 규정하는 건 내가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달려있다고 본다. 신학교에 입학했던 2007년부터 아내와 결혼한 2017년 초까지 겪었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모든 과정들이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 위한 여정이라고 여겨진다. 계속 신학교를 다녔더라면, 부산으로 내려오지 않고 계속 서울에서 공부했더라면, 부산에서 공부를 병행하지 않고 회사에서 일만 했더라면, 어느 것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지금의 아내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내가 내 운명이다. 그리고 아빠로서 우리 아들과 딸을 열심히 키우는 건 나의 숙명이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아내와 우리 아들 딸과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도 그리고 현재도 틈틈이 계속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도 모두 다 내 가족을 지키고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함이다. 운명인지 숙명인지 가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매순간 나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 고민하고 후회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어제(10월31일)는 나의 운명인 아내의 생일이었다. 아이들이 학교와 유치원에 가 있는 동안 아내와 오랜만에 둘이서 점심을 먹었다. 맛있게 잘먹고 소화시킬 겸 집으로 걸어오는데 아침에는 흐렸던 날씨가 화창해졌다. 가을 날씨에 걸맞게 청명했다. 언제나 항상 지금처럼 알콩달콩 행복하게 지내자 여보.

모든 게 완벽한 하루였던 아내의 생일. 언제나 고맙고 사랑해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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