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9일 수요일
추석 연휴 이후 부쩍 쌀쌀해졌다. 이번주 부산은 아침 기온이 10도 이하로 떨어졌고, 낮기온은 아침기온과 10도 가까이 차이가 난다. 아침 저녁은 초겨울 날씨이다. 낮에 햇볕 아래는 덥고 그늘 밑은 쌀랑하다. 바람까지 불면 찬기가 느껴진다. 하루에도 온도 차이를 몸으로 몇 번씩 느낀다. 이 시기에 아이들이 감기에 잘 걸린다. 아들과 딸이 다니는 학교와 유치원에 감기로 훌쩍이고 기침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계절이 바뀌는 흐름과 거기에 몸이 적응하는 속도가 다른 탓이다. 일기예보를 확인해보니 다음주는 이번주보다 아침 기온과 낮기온이 모두 오른다. 아침에는 10도에서 12도 언저리에 머무르고 낮기온은 20도까지 오른다. 10월 말보다 11월 초의 기온이 더 높다는 사실이 어색하다. 기후변화로 봄과 가을은 짧아지고 여름이 겨울보다 길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꽤 되었지만, 아직도 10월 초부터 11월 초중반까지는 가을이 느껴져야 하는 데에 더 익숙하다. 물론 현실은 단풍이 거의 보이지 않는 걸음마 상태이지만 말이다.
은행잎이 물드는 시기는 은행열매가 익기 전 또는 동시에 진행된다고 한다. 은행열매는 제법 떨어졌는데 아직 은행잎은 푸르다. 가을철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10월 말에서 11월 중순경부터 물든다고 하는데, 다음주 기온을 보니 그 이후나 되어야 노란 은행잎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주 날씨가 지난주에 비해 유독 쌀쌀해서 그런지 따뜻한 국물요리가 자주 땡긴다. 갈비탕이나 돼지국밥처럼 담백하고 구수한 국물부터 육개장이나 감자탕, 어탕국수같이 얼큰하고 칼칼한 음식까지 종류를 망라하고 국물이라면 다 좋다. 국물도 좋지만 추워지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어렸을 때는 집에서 엄마가 꼭 직접 하셨지만 요즘은 공장의 도움으로 먹는 음식인 김치다. "겨울은 김장하는 계절이다." 라고 생각할 정도로 매년 김치를 담그셨다. 중학교 즈음부터는 직접 하시지 않고 외할머니와 외숙모께서 담그셔서 보내주신 김치를 먹었지만, 엄마가 막 담근 김치를 쭉 찢어서 갓 지은 흰밥에 올려서 먹었던 맛은 그때 만큼은 고기 부럽지 않았다.
막 담근 김치를 다시 먹게 된 것은 결혼해서였다. 어머님께서 매년 김치를 담그셔서 나눠주신 덕분이다. 어머님 위로 이모님이 세 분 계신다. 제일 큰이모님께서 매년 김치를 담그시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이모님의 자녀들은 물론 형제들과 그 자녀들 먹을 양까지 다 하신다. 그래서 어머님은 물론 다른 이모님들께서 다같이 큰이모님을 도와 김장을 하신다. 요즘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다 모이시지 못하고 양도 그 정도까지는 하지 않으시지만, 아내의 말로는 예전에 김장을 하면 그날은 잔치하는 날이라고 했다. 김장을 끝내고 다같이 모여 수육을 삶고 한잔 나눠드시며 그날의 고단함을 푸셨다고 한다. 시장에서 직접 발품을 팔아 재료를 준비하고 배추를 절이고 양념을 만들고 배추에 버무리고 하는 과정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재료 준비와 배추 절이는 시간은 별개로 양념을 만들고 배추에 버무리는 데에만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걸리셨다고 한다.
그렇게 탄생한 귀한 김치를 결혼한 첫 해부터 먹었다. 나는 양념이 듬뿍 묻혀있고 젓갈향이 가득 들어오는 김치를 좋아하는데, 어머님께서 주신 김치가 딱 그러했다. 어렸을 때 엄마는 양념을 강하게 하지 않으셨다. 나와 동생이 어려서도 그랬겠지만 아버지가 양념이 많지 않은 걸 좋아하셨다. 아버님께서도 양념이 강한 걸 선호하지 않으셔서 나와 아내가 결혼하기 전에는 다같이 열심히 김치를 담그셔도 조금만 가져오셨다고 했다. 아내도 그렇고 집에서 김치를 많이 먹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사위 사랑은 장모님" 이라고 내가 좋아하는 걸 아시고 나서부터 잔뜩 주셨다. 죄송한 마음에 매년 담그시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최근 몇 년은 이 즈음이면 어머님 혼자서라도 담가서 주신다. 큰이모님의 김장 스케줄에 맞추지 않고 틈틈이 담그신다. 아내가 어머님께 '아이들이 김치를 많이 먹어서 그때마다 자주 김치를 사먹으니 힘들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어머님께서는 알겠다고 하시고 다음날 몰래 담가서 주신다.
나와 아내 둘이 있을 때보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필요한 김치의 양이 점점 많아졌다. 김치 4kg를 주문하면 순식간이다. 아들은 본인이 원하는 김치의 맛이 딱 정해져있다. 김치가 살짝 익었을 때를 가장 선호한다. 막 담근 건 아직 양념이 줄기에 배어있지 않아서 별로라고 하고, 더 익으면 신맛이 난다고 먹지 않는다. 그래서 한번 주문할 때 더 많은 양을 주문하기가 어렵다. 많이 주문했다가 폭삭 익어버리면 남은 건 나와 아내의 몫이다. 그래서 자주 살 수밖에 없다. 어머님께서는 사먹는 김치도 맛있지만 그래도 직접 한 게 더 맛있다며 필요할 때마다 이야기 하라고 하신다. 아내는 알겠다고 하고 쿠팡으로 주문한다. 몇 년 전부터 어머님이 손목과 무릎이 불편하셔서 혼자 담그시는 건 무리다. 아내는 이번 김장 때는 같이 김치를 담그자고 어머님께 말했다. 어머님께서 분명 알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어제(10월29일) 김치를 담갔으니 받으러 오라고 하셨다.
아내가 며칠 전 지나가는 말로 집에 익은 김치만 있다고 한 걸 기억하시고 아침부터 담그신 것이었다. 나는 어머님께 김치를 받으러 가서 연신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님께서는 인자하게 웃으시며 하루이틀 정도 상온에 두면 살짝 익을테니 그때 아이들에게 주고, 자네는 막 담근 걸 좋아하니 이대로 먹으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김치가 담긴 통은 크고 묵직했다. 김치통이 들어있는 쇼핑백에는 어머님의 손맛이 배어있는 나물 반찬들도 함께 있었다. 종류도 다양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손잡이가 차가웠다. 하지만 곳곳에 어머님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어서 난로보다 따뜻했다. 상온에 하루 둔 김치는 오늘(10월30일) 아이들 식탁에 올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