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하루였다. 일주일 치, 아니 한 달치는 되는 사회성을 끌어다 쓴 것 같다. 입학식 때부터 활발하게 말을 잘 붙이던 J는 본격적으로 모두와 친해질 셈인지 열 명 규모가 되는 약속을 잡았다. 먼저 자리를 만들 용기는 없는 나는 누가 만들어준 자리에 감사합니다 하고 참석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친해지고 싶은 사람을 찾기도 힘들다.
학교 정문 앞에서 모여 다 같이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딱 맞춰 도착하니 이미 모인 몇 명은 벌써 3년은 안 사이처럼 대화가 통한다. 저런 능력은 타고 나는 걸까. 내가 사회화가 덜 된 건가. 나는 인사를 건네는 것조차 이렇게 긴장이 되는데. 한창 대화중인 저들의 흐름을 끊고 인사를 나누는 건 생각만 해도 벌써 힘들다. 최대한 가벼운 인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대화에 스며들어보자. 나로서는 비장한 목표와 함께 조용하고도 존재감 없이 슬쩍 J 곁에 서서 '나 왔어.' 인사한다. 어, 안녕! 발랄하게 반기듯 돌아오는 인사에 마음이 편하다. 나는 저렇게 인사하는 게 왜 어렵지. 다른 애들과도 어색한 눈인사를 나누고 잘 지냈어? 너는 무슨 수업 들어? 근황을 묻는 사이 남은 인원도 속속 도착했다.
유명하다던 덮밥집은 웨이팅이 길어 가지 못하고, 적당히 골라서 들어간 피자 가게는 늘 알던 그 맛이었다. 친하다 말하기 머쓱한 동기들과 친해지기 위해 되는대로 떠들고 웃느라 몸이 다 굳었다. 긴장 때문인지 아직도 겨울 같은 3월 날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밥 먹고 수다 떤 것 밖에 없는데 밤을 샌 것처럼 피곤하다. 집 들어가는 길에 장이나 봐가야지. 오늘 저녁엔 맛있는 걸 먹어야겠다.
"이제 어디 갈까?"
나는 저녁밥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J는 다음 장소를 고민하고 있다. 단번에 난처한 기분이 되어 '나는 약속이 있어서 못 가.' 해버렸다.
"그렇구나, 어쩔 수 없지. 되는 사람?"
거짓말이다. 약속 따위는 없다. 너무도 쿨하고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대화에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해버린 찌질한 나를 한 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굳이 거짓말을 왜 한 거야? 자괴감 든다. 아직 세 시밖에 안 됐는데 눕고 싶다. 집, 집, 집. 집 가고 싶다. 언제부터 자취방을 집이라 불렀다고. 그래도 서울에서는 가장 편한 장소이긴 한가 봐. 이런 때에는 저절로 집이라고 부르게 된다.
다음을 기약하는 인사는 어쩜 이렇게 가뿐한지. 직전까지 긴장하고 있던 어깨가 부드러워지면서 바로 저녁을 따라갈 수 있을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진다. 심지어 아쉬운 것도 같다. 이 기분은 가짜야, 얼른 집에 가자. 저절로 어깨가 곱아드는 한기에 빠른 걸음을 더 빨리 걸었다. 어쩜 그렇게 잘 웃고 잘 묻고 답할까. J는 여러모로 신기했다. 나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건강하고, 예쁘고, 활발한 스물. 누구나 꿈꾸는 스무 살은 그의 모습이 아닐까. 나도 모르게 그를 떠올리며 감탄하다가 무슨 말을 하든 서투르고 어색하게 웃던 내 모습이 겹친다. 갑자기 부끄럽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얼른 다른 생각을 잇는다. 집에 가면 보일러 먼저 켜고 오늘 찍은 사진들 정리해야지. 한 칸짜리 방에 집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어색해서 '집'이라는 한 글자 대신 '자취방' 세 글자로 부르던 게 바로 어젠데. 바깥이 어색하니 바로 집이 되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보일러 먼저 튼다. 바깥보다 집이 더 추운 것 같다. 발이 어는 느낌에 얼른 따뜻해지라고 온도 조절 버튼을 끝까지 돌렸다가 난방비가 무서워 적당한 온도로 다시 맞춘다. 제발 빨리 따뜻해져라. 추워서 바로 씻지도 못하겠고, 대충 이불만 둘러쓴 채 노트북 앞에 앉았다. 방 데워질 때까지 찍은 사진이나 옮겨둬야지. 카메라를 연결하고 파일을 복사한다. 예상시간 15분. 가만히 있으니 너무 추워서 차를 끓이기로 한다. 포트에 물을 받고 티백을 꺼낸다. 감기에 잘 걸리는 나를 위해 엄마가 놓고 간 티백만 세 가지에 유자차, 매실차, 귤차까지 찬장에 차가 잔뜩이다. 순식간에 펄펄 끓은 물에 티백 하나를 담그고 다시 의자에 쭈그려 앉았다. 익숙한 향이 퍼진다. 그 사이 사진이 다 옮겨졌다. 오늘 찍은 사진만 수 백 장, 열심히도 찍었다. 내향인은 대화보다 찍사 노릇이 더 편한 법이다. 머그컵을 손난로처럼 감싸고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긴다. 이거 잘 나왔네. 이것도 예쁘다. 괜찮은 사진을 몇 장 발견하니 자동으로 본격적인 마음이 된다. 이왕이면 예쁜 사진으로 주고 싶다.
사진을 추리고 포토샵까지 켰는데도 목에 닿는 공기가 서늘하다. 방이 바로 데워지지는 않을 모양인지 온기가 흔적도 없다. 다시 이불을 고쳐 두르고 뜨거운 차가 담긴 머그컵을 노트북 앞으로 옮긴다. 추워 죽겠다. 지은 지 10년 됐다더니 보일러도 오래된 건가. 왜 이렇게 보일러가 안 돌아가는 것 같지. 의심을 한가득 담아 보일러를 째려보면 억울하다는 듯 빨간 불빛이 또렷하다. 보일러엔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그 사이 수면 양말도 꺼내 신었다. 추워, 추워. 무릎을 껴안고 몇 번을 생각한다. 왜 이렇게 안 따뜻해지지. 보일러도 켰고, 티도 마셨고, 이불도 두르고 있는데 너무 춥다. 아직도 차가운 발 끝을 손으로 만지다 방을 둘러보면 눈을 한 번만 굴려도 작은 방이 다 들어온다. 길쭉한 싱크대 아래 작은 세탁기, 그 끝에 마감처럼 붙은 냉장고, 한쪽 벽을 가득 채운 행거와 남은 벽을 다 가리는 책상, 침대 대신 바닥에 누운 매트리스.
알았다. 여기에 온도를 내는 거라고는 나와 보일러 밖에 없다. 방을 데울만한 온기라고는 나밖에 없다. 순식간에 외로워진다. 나 지금 혼자구나. 정말 혼자 살고 있구나. 어른이 되어 혼자가 되는 날만 기다렸는데, 혼자 산다는 건 이런 거구나. 앞으로 쭉 이렇게 살겠구나. 몸을 데우는 것조차 애쓰면서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