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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웅 Jul 11. 2022

상사가 말하는 '상식', 부하에게도 과연 상식일까

너와 나의 온도 차이

“왜 B는 없고 A랑 C만 있어?”


아마도 90년대 후반부 즈음으로 기억합니다. 동네 형 곁에서 ‘내 컴퓨터’(요즘엔 ‘내 PC’로 표기되는 바로 그 탐색기) 창이 뜬 모니터를 바라보다 문득 이런 질문을 던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A 다음가는 드라이브 문자로 B 대신 C가 곧장 나오는 광경이 의아했던 것인데요.


“5.25인치 디스켓이 빠졌으니 그렇지.”


“그게 뭔데?”


“이만한 큰 디스켓 몰라?”


“모르는데.”


“아는 게 뭐냐?”


그때 그의 말하는 본새는 흡사 구구단을 헷갈려 하는 고등학생을 다그치는 투였습니다. 남들은 유치원에서 떼고 온 기본 교양을 어쩌다 저만 잊었나 싶을 정도였죠.


훗날 돌이켜 보건대 그 형의 난데없는 짜증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습니다. 사회 전반으로 퍼스널 컴퓨터 보급이 한창이던 그 시기엔, 고학년 중에선 그 양반처럼 4교시 마치면 은박지로 감싼 하드디스크를 카피하고 다니는 것이 일과였던 마니아도 심심찮게 출몰했거든요. 어울려 다니는 또래들이야 웬만해선 그 정도 개떡같은 언급이면 찰떡같이 알아들을 법도 했겠죠.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세대가 아주 살짝 어긋날 뿐인 저학년 부근에선, 저처럼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나 드라이브 문자 구조는커녕 부팅이나 백업의 개념조차 제대로 이해 못하는 무지렁이가 태반이었습니다. 고작 몇 년 빨리 컴퓨터를 접해 봤느냐 말았느냐에 따라 지식 차이가 극명했던 것이죠. 딱히 연령대에 비해 잘못 배운 사람은 없는데도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짜증이 솟았던 꼴은 그러한 시대적 상황 탓에 연출됐던 셈입니다.


이 디스켓, 실제로 보신 적이 있나요?/페이스북 ‘5¼-inch floppy diskettes’ 페이지




얼마나 시간이 흐른 뒤였던가요. 저 역시 그 형이 예전에 느꼈을, ‘현대인이 설마 이걸 모른다고?’의 기분을 살짝 맛볼 순간이 있었습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병원(Penn Medicine) 에이브러햄 암 센터가 내건 광고 덕분이었는데요.


/@bloodberry_tart 트위터


급식 먹는 나이부턴 누구라도 암 발병에 예외가 없다는 취지인가? 하는 생각도 아주 잠시는 스쳤습니다만. 이내 밀려 들어오는 서글픈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공교육에 발끝이라도 담가 본 사람이라면 ‘플로피 디스크’를 모를 리 없다는 식의 사고 전개는 구세대의 낡은 관념일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체 강건하고 기운은 충만해 암병원과는 아직 거리가 한참 먼 ‘요즘 젊은이들’은, 어지간해선 그간의 생애 내내 저 물건을 접해볼 기회조차 없었을 테니까요.


실제로 최근 신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청년들은 출생한 연도가 대개 1995~1998년쯤이던데요. 이들 대다수는 아마도 2002~2005년부로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것입니다. 그 시절이면 CD-ROM 레코더를 갖춰 둔 가정집도 꽤 있었고, VDSL을 활용한 데이터 송수신 또한 그리 드물지도 않았죠. 


당시엔 고작해야 1.44MB밖에 넣을 수 없는 플로피 디스크 따윈 벌써 학교 컴퓨터실이나 아빠의 비밀창고에서나 볼까 말까 한 유물이 된 지 오래였습니다. 30~40대 직장인이라면 폭넓게 공유할 법한, 디스켓 여럿에 나눠 담은 대항해시대 2나 삼국지 3, 프린세스 메이커 2를 하나하나 복사해 깔던 추억은, 그들 입장에선 도통 와 닿을 구석이 없는 무용담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비단 플로피 디스크뿐이겠습니까. 30대 후반 이상이라면 얇은 액정보다 오히려 눈에 익었을 큼직한 CRT 모니터도, 한때는 4000만 국민 중 절반이 사용했던 삐삐라는 기기도, 저희 또래 고등학교 시절까지도 현역으로 굴렀던 카세트테이프도, 잊을 만하면 누군가가 해괴한 영어 발음을 입력 송출하며 야간 자습 시간 분위기를 흩트려 놓던 전자사전도 작금의 청년들에겐 한낱 전래동화 속 골동품일 뿐이겠죠. 요즘엔 급기야 스마트폰에서 전화 아이콘으로 쓰는 ‘수화기’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몰라 정체를 묻는 학생도 왕왕 있다 하잖습니까. 세태가 이러할진대 21세기 즈음에나 세상 빛을 봤을 앳된 이들을 상대로 그런 것들을 모른다며 상식의 부재를 타박한다면, 아무래도 곱고 정중한 반응이 되돌아오길 기대하긴 쉽지 않겠죠.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게티이미지뱅크




상식적으로 행동해라. 그런 상식적인 것도 모르냐. 그 누구라도 살다 보면 듣거나 입에 담는 때가 은근히 잦은 소리입니다만. 사실 동년배나 사회적 지위가 유사한 집단 내에선 기본 교양 내지 상식으로 통용되는 지식일지라도, 몸담은 곳이 살짝이나마 엇갈리면 전혀 이해도 공감도 못 할 별소리 취급을 당하는 경우가 적잖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령자 쪽에서 연소자의 미욱함이나 몰상식을 질타하는, 비교적 예사롭게 접할 수 있는 그러한 상황들은 물론, 반대로 팔로워 연배에서 현대 문물을 낯설어 하거나 능숙히 다루지 못하는 리더급 세대를 답답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때도 제법 있죠.


가령 기성세대가 현금 없는 버스에서 요금 지급을 주저하거나 배달앱이나 키오스크를 활용한 주문을 어려워하는 때, 훨씬 어린 아이들은 굼뜨기 짝이 없는 어른들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광경을 근래엔 흔히 볼 수 있고요. 윗세대에선 생소히 여기며 지대한 관심을 쏟는 ‘메타버스’에 청년 상당수는 별다른 감흥을 보이질 않는 현상도 광범위하게 관찰됐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선 메타버스를 비롯한 가상 현실쯤이야 이미 유년기 시절부터 온라인 게임을 통해 한껏 누리고 경험해온, 지극한 ‘상식’과 ‘일상’의 영역이었기 때문이죠.


그래픽 수준의 차이만 있을 뿐, 요즘 거론되는 ‘메타버스’의 웬만한 요소는 이미 20세기 말엽에 흥행했던 MMORPG들에 상당 부분 구현돼 있었죠./넥슨


지난 2020년 3월 직장인 교육 전문 기업인 휴넷이 팀원급 직장인 512명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설문 조사에서도, 전체 응답자 가운데 54.8%가 팀장에 대해 불만족스럽다고 답했으며, 그 이유로 주요하게 꼽힌 것이 ‘교양·매너·상식 부족’(28.1%·복수 응답)이었습니다. 위에서 아래의 몽매함에 터트리는 분통만큼이나, 아래에서 한탄하는 위의 무식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서로 상정하는 ‘상식’의 범주가 판이한 탓에 말이죠.




그럼에도 그 누구인들 흔하게 어울리거나 부딪히는 주변인은 대개 또래 혹은 성향이 비슷한 집단인 만큼, 유유상종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사고 체계가 보편적인 진리이며 대세라 착각하기 쉽습니다만. 오랜 세월에 걸쳐 의심 없이 당연하다 믿어왔던 관념이 어느덧 낡은 견해로 전락해 버렸거나, 현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숙지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습속이 알고 보니 일부 청년 무리의 전유물이었을 뿐인 때도 상당합니다.


이를테면 과거와는 달리 요즘 세대에선 왼손잡이가 왼손으로 밥을 먹는 것을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라 인식하지 않습니다. 일 없이 날이 저물어도 사무실에 하릴없이 머무르는 오랜 풍습 역시 종전과는 달리 상식이나 미덕으로만 통용되지도 않고요.


반대로 어른 세대에선 OTT 구독 절차나 이용법을 정확히 모르는 이가 아직도 수두룩하며, 급식 먹는 연령대에서 메신저라 하면 ‘카카오톡’이나 ‘라인’보다는 ‘페메(페이스북 메신저)’나 ‘인스타그램 DM(개인에게 보내는 다이렉트 메시지)’쪽이 상식으로 통하는 것도 생경할 일이죠. 가격 대비 퀄리티가 그리 대단한지도 모르겠을 ‘인스타 감성 가게’ 대기열에서 몇 시간을 버려 놓고선, 더할 나위 없이 충실한 여가를 보냈다 자평하는 젊은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말하는 분도 꽤 있지 않습니까.




독일엔 '빌레펠트 음모론(Bielefeld Conspiracy)'이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빌레펠트에서 온 사람을 본 적도 없고, 나는 물론 지인들도 빌레펠트에 다녀온 경험이 없으니, 그런 도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인데요. 빌레펠트는 실제 존재하는 도시로 인구가 33만명에 달하며,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데드몰트현의 유일한 군급시(군 아래 속했던 시가 크게 성장해 분리 독립한 행정구역)이기까지 합니다. 나의 상식선에 존재하는 개념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일깨워 주는 우스갯소리인 셈이죠.


‘빌레펠트 음모론’, 혹은 ‘빌레펠트 부존설’이라 불리는 저 농담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합니다. 사진은 빌레펠트 시내 전경./게티이미지뱅크


그렇기에 현명하고 식견 있는 직장인이라면, ‘상식’을 들먹이며 리더나 팔로워를 원망하거나 꾸짖기에 앞서, 본인이 염두에 두고서 근거로 삼는 그것이 정녕 세대를 널리 꿰뚫는 일반론인지를 침착히 살필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 각자가 너무나도 쉽게 보편이라 믿어 버리는 개개인의 상식 구간은, 막상 헤아려 보면 타인의 그것과 겹치는 범위가 의외로 좁은 데다 변화와 갱신마저 절실한, 낡고도 편협한 영역이기 일쑤니까요. 빅데이터 전문가인 송길영 바이브컴퍼니 부사장이 저서인 ‘상상하지 말라’를 통해 짚어 냈던 바와 같이 말이죠. “자기만의 프레임에 갇힌 생각이나 한물간 통념을 ‘상식’이라 부르는 것은 일종의 형용모순입니다. 상식 수준의 판단을 할 수 있으려면 변화하는 상식을 계속 찾아내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더욱 많은 이야기가, '오늘도 출근중'에서 독자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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