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야 맞는 말이다만
“너희가 내놓는 기사의 퀄리티는, 우리의 적들이 보더라도 감동해 눈물을 흘릴 정도여야 한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기자분 중 이러한 말을 버릇처럼 입에 올리던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진실을 꿰뚫어 폭로하는 기사엔 이해관계나 진영논리마저 무너뜨릴 힘이 있으며, 저널리스트라 불리는 자라면 응당 그러한 글을 쓰는 것이 마땅한 본분이라 힘주어 말하곤 했습니다. 휘하에 새 사람을 맞을 때면 노트북 지급은 잊을지언정 저 훈시만큼은 빼먹는 법이 없었을 정도였다는데요.
하지만 그의 밑에서 일했던 기자 중, 그와 함께하는 동안 이러한 규범을 적극 실천하려 들었던 친구는 의외로 드물었습니다. 물론 저 법칙 자체부터가 실제 행동으로 재깍 옮기기엔 말만큼이나 쉽진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만. 그렇다 한들 기왕 언론계에 몸담은 이상 준수해 보고자 노력이라도 한다면 나쁠 구석도 달리 없을 신조였는데 말이죠.
사실 이와 관련해선 마냥 팔로워만을 탓하긴 어려운 사정이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문제의 근원은 오히려 리더십 쪽에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이야 짐짓 준엄하게 했으나, 막상 실무에 임할 적엔 본인부터가 누구보다 기사별 클릭 수에 무던히도 매달리며 일희일비하는 타입이었죠. 업무 평가에서도 아티클의 정성 부문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만인의 경탄을 자아낼 정도로 내용이 좋은 기사라도 유저 뷰가 희박하면 그를 슬프게 할 뿐이었습니다. 우수한 직원이라 추켜올리며 포상하는 인물 또한 결국엔 확보한 총 클릭 수가 가장 많은 기자로 수렴했고요. 몸소 겪는 업무 풍토가 이 모양일진대, 그가 상시 되뇌는 ‘기자 정신’에 굳이 동조해 움직일 순박한 주니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혹여나 그분이 기사의 품격과 독자 유입을 동시에 잡을 신기나 묘책을 후학들 앞에서 친히 보이셨다면 판도가 사뭇 달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마저도 도통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그가 이따금 손수 작성하던 기사마저도 방점은 철저히 어뷰징 쪽에 놓여 있었거든요. 그렇다 해서 흥미 본위의 기사에 깊이나 감동을 자연스레 끼얹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필력이나 기사 구성 스킬이 탁월했던 것도 아니었고요. 그러한 와중에도 여전히 혼이 결여된 글은 기사라 칭할 수 없다 부르짖는 모습은, 자식에게 앞으로 걷는 법을 가르치는 꽃게만큼이나 비루할 따름이었죠.
아무튼 이처럼 윗선의 지시와 행동이 판이하게 엇갈리는 상황에서, 실무자 대다수는 결국 명분 대신 실리 쪽을 택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분이야 기개 없고 천박한 후배들을 질타하며 저널리즘의 미래를 깊이 염려하셨습니다만. 바깥에서 그 꼴을 지켜보기론 기실 탁한 윗물이 아랫물에 대고 더럽다 꾸짖어 대는 희극에 지나지 않았죠.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읽다 보면 ‘이중사고’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명제를 의구심 없이 동시에 믿거나 행하는 양상을 일컫는 말인데요.
공상 속의 이야기나 우화 정도로 치부하기엔, 우리네 현실에서도 이러한 행태를 보이는 사람을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도 심지어 조직의 선두에서 방향을 설정하며 업무를 추진하는 핵심 인물인 ‘리더’가 말이죠.
말과 행동이 다른 리더가 사랑받기를 바라는 것은 도를 넘는 사치일 뿐입니다.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 2021년 11월 전국 만 19세~59세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61.7%·복수 응답) 작은 약속을 잘 지키며(50.6%), 입이 무겁고(47.6%), 상황이 변해도 일관성이 있는(46.6%) 사람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신뢰할 수 없는 인물로는 말과 행동이 많이 다르고(64.3%·복수 응답), 입이 가볍고(59%),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으며(56.3%), 일 처리에 일관성이 없는(55.9%) 사람을 지목했습니다.
게다가 언행불일치가 심한 리더는 휘하의 신망을 잃기에 앞서, 그보다 윗선인 수뇌부 쪽에서 더 싫어하고 꺼린다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휴넷이 2020년 3월 직장인 702명(직원 567명, CEO 135명)에게 물었을 때 직원과 CEO 모두 최악의 리더로 말과 행동이 다른 ‘언행불일치형’을 가장 많이 꼽았는데요. 직원의 해당 답변 선택 비율은 40.7%이었던 반면 CEO는 무려 55.6%에 달했습니다. 그들이 일삼는 일구이언이나 표리부동이 대개는 처세와 보신을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에 미루어 보면 상당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죠.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민족은 한참 웃어른 세대에서 이미, 내뱉는 소리에 일관이 없으면 일구이언은 이부지자(二父之子)라며 면전에서 애비가 짝수라 욕을 꽂아 버렸던 전통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요즘 시대엔 지행합일이 안 되는 사람일지라도 이 정도로 독하게 모욕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문 만큼, 행실이 언변을 따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혐오는 옛 시절에 훨씬 심했다 말할 수도 있겠는데요. 그런 고로 팔로워보다는 훨씬 기성 세대나 고연령대가 많을 C-Level 이상 급에서, 말과 행동이 저 좋을 대로 따로 노는 리더를 예뻐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적잖은 기대일 테죠.
물론 그러한 이중적 태도를 온 평생에 내내 걸쳐서도 능숙히 감추거나 무마할 자신이 있는 분이라면 언행불일치마저도 탁월한 처세술의 일환이라 간주할 여지도 아주 없진 않겠습니다만. 어쩌다 계획이 틀어졌을 때 감당해야 할 후폭풍은 차라리 대놓고 부도덕하게 살았던 인물이 짊어졌던 업보 이상으로 무거울 것입니다.
실제로 데이비드 랜드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이 지난 2017년 619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해 발표한 'Why do we hate hypocrites?(우리는 왜 위선자를 혐오하는가)’ 논문에 따르면,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규율을 위반해 대는 사람보다 평소 도덕적인 발언과 언행일치를 강조했던 사람이 부도덕한 행동을 했을 때 한층 더 거부감을 더 느끼며 분노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연구팀은 "사람들은 위선자가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가 과거 원칙을 내세워 도덕적인 사람으로 위장했기 때문에 분노를 표했다"며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자 타인에게 도덕적인 비난을 일삼았던 사람은 거짓말쟁이보다 더한 악당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기에 리더 본인부터가 도무지 모범을 보이며 행할 자신이 없다면, ‘좋은 말씀’을 무작정 남발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리더십 유지엔 되려 유리한 전략일 수 있습니다. "옛날에 선현들이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실천이 이에 미치지 못할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古者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는 공자님 말씀이 결코 괜한 우려는 아니라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