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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웅 Aug 08. 2022

여긴 시간 여행자만 채용하는 회사인가요

내가 대체 어디까지 맞춰 줘야 해

이것은 지난 7월 말 즈음 영미권 개발자 사이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던 JD(Job Description) 중 일부입니다. 미국의 한 리쿠르팅 전문 기업이 내건 채용 공고에 들어 있던 내용인데요.


/nixCraft 트위터


연봉이 파격적으로 높다거나 복지 혜택이 상식 바깥을 넘나들 정도로 크고 아름답다는 등의 미담이 있어 이목을 끈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돌아가는 상황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죠. 이들이 ‘필수 지원 조건’으로 내건 경력 사항에 정상적인 후보자 탐색이 불가한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카본(Carbon) 경력’이었습니다. 카본은 구글에서 개발한 다목적 범용 프로그래밍 언어로, 해당 공고에선 필수 지원 자격으로 ‘10년 이상 경력, 예외는 없음’(Must have 10 years of Carbon experience – no exceptions)을 못 박았는데요.


주니어 개발자를 뽑으면서 경력을 최소 10년 이상 요구하는 것도 상당히 기괴한 파격이었지만요. 사실 그보다도 훨씬 도발적이었던 지점은, 바로 카본이 출시된 지 1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신생 중의 신생 언어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네, 10년은커녕 1년도 아니고, 고작 1개월 말입니다.


카본은 지난달 19일(현지 시각)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개발자 콘퍼런스인 C++노스(CPP North)에서 대중에 최초로 공개됐습니다. 구글 오픈소스 엔지니어인 챈들러 캐러스는 1985년에 출시된 이래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프로그래밍 언어 중 하나인 C++를 대체하고자 카본 개발을 시작했다 설명했습니다. 구글의 소개에 따르면 카본은 C++의 고질적인 보안 취약점인 메모리 버그 등을 해결한 데다, C++와 구조 또한 비슷해 기존 코드를 그대로 활용할 수 있어 호환이 편리합니다.


다만 카본이 우수한 프로그래밍 언어인지를 아닌지를 따지기에 앞서, 시공간의 한계가 엄연히 존재하는 만큼 현시점엔 지구상에 ‘10년 이상 경력자’를 찾을 방도가 없다는 사실만큼은 너무나도 자명했죠. 심지어 오픈소스로 전환된 프리뷰 버전마저도 고작 0.1에 불과하니, 설령 카본 탯줄을 만져 본 친부모급 개발자라도 이를 활용해 뭔가를 제대로 해보기는 아직 한참이나 요원한 상황입니다.


/nixCraft 트위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니어’를 뽑는다면서 10년 이상 경력을 요구한 점이나, C++와의 호환성이 핵심인 프로그래밍 언어인데도 C++ 경력은 고려하지 않는다 선을 그어 버린 부분이나, 업무상 겹치는 부분이 적어 경험을 동시에 쌓기 힘든 카본(주로 백엔드), 리액트(주로 프론트엔드), AWS(주로 서버 관리 및 배포)와 포토샵(주로 디자인) 역량을 전부 요구하는 것 등이 워낙 해괴한지라, 일각에선 업계를 잘 아는 사람이 문제를 잘 알고 있음에도 모종의 이유로 일부러 배포한 공고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그 ‘모종의 이유’로 짐작 가능한 사안 중 그럴듯한 것이 달리 없기에 대단한 설득력을 얻진 못하는 판입니다. 오히려 간결하고도 직관적인 설명일수록 진리에 가깝다는 ‘오컴의 면도날’에 의거하자면, 개발 분야를 잘 모르는 임원이나 리쿠르터가 평소의 관성대로 채용 공고를 제작했다가 터져 버린 사고일 확률이 훨씬 크긴 하죠.




리쿠르터야 그렇다 쳐 주더라도, 임원씩이나 되는 분이라면 본인 관리 하에 있는 업무 영역에 그렇게나 깜깜하기도 쉽진 않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지만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잘 아실 것입니다. 필드에서는 그런 황당한 상황도 생각보단 꽤 빈번하다는 사실을 말이죠. 특히나 높은 자리에 앉으신 양반들의 입직 루트가 능력 검증 과정이 미미하거나 희미했던 ‘낙하산’일 경우, 그러한 사태를 접할 위험은 더욱이나 폭증하기 마련이고요.


예를 들어 지난 2016년 9월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인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이 분석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금융공공기관과 공공기관이 지분을 보유한 금융회사 27곳의 임원 255명 중 38%에 달하는 인원인 97명이 ‘낙하산 인사’로 분류됐습니다. 그중에서도 9곳은 임원 대비 낙하산 인사 비중이 50%를 넘기기까지 했습니다. 


채 의원은 당시 “업종에 문외한인 낙하산들이 회사 경영진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부실을 키운다”며 "전문성 없는 낙하산 인사는 즉시 해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낙하산이 적지도 않을뿐더러 그들 중 대부분은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전문성마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죠.


이것은 비단 공공기관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조금 오래전 자료이긴 하지만, 지난 2010년 사람인에이치알이 직장인 568명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설문조사에선, 무려 72.9%가 ‘회사 생활을 하면서 낙하산 인사를 본 경험이 있다'는 응답을 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기업 형태별로 분류했을 때 그러한 경험을 해 본 직장인 비율은 공기업에서 81.8%로 가장 많긴 했지만, 중소기업(72.3%)이나 외국계 기업(72.2%), 대기업(70.4%) 또한 결코 무시할 만한 수치는 아니었습니다.




실력 있는 지원자들의 눈엔 턱없는 조건을 필수 경력으로 요구하는 회사가 되려 지극히 우습게 비칠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우수한 스펙을 지닌 인재를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무지에 기댄 욕심 탓에 오히려 그들을 튕겨 내는 장벽으로 기능하는 셈이죠.


그렇기에 세련되고도 매력적인 JD를 만들기 위해선 실무자와의 활발한 소통이 반드시 전제돼야 하며, 특히나 임원이 채용을 원하는 분야에 지식이 모자랄 경우라면 적극적인 경청과 수용은 한층 더 요구될 수밖에 없는데요. 


이는 아직 국내 회사 대부분에선 꽤 요원한 이야기이긴 합니다. 이를테면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 2017년 2월 상장사 직장인 약 1000명을 설문 조사해 발표한 ‘국내 기업의 회의문화 실태와 개선해법’ 보고서에선 75.6%가 회의 때 ‘상사의 의견대로 결론이 난다’고 응답했다 밝혔던 바가 있었죠. 하지만 최근 들어 유수 대기업에서 상사와 부하 간의 소통을 최대의 화두로 제시한다거나, 젊은 직원이 멘토를 맡아 선배들을 코칭하고 가이드하는 ‘리버스 멘토링’을 도입하는 등, 긍정적인 변화의 조짐은 사회 전반에서 조금씩 천천히 불거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통계청


여러분이 몸담은 일터에서도 ‘카본 10년 경력자 채용’에 준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면, 이러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상하 간의 쾌적한 소통이 곧 일상이 되는 ‘체질 개선’을 도모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 역시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현대의 경영이나 관리를 좌우하는 것은, 바로 커뮤니케이션이다.”



더욱 많은 이야기가, '오늘도 출근중'에서 독자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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