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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웅 Aug 16. 2022

ESG, 이럴 거면 안 하는 편이 차라리 낫지

진정성의 가치

“최근 연구에 따르면, 테일러 스위프트는 모든 유명인 중 가장 큰 오염 물질입니다.”


이는 한 언론이 지난 7월 영국의 디지털 마케팅 회사인 야드(Yard)가 발표한 '최악의 전용기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가진 유명인' 보고서를 보도하며 사용한 표현입니다. 해당 보고서에서 야드는 전 세계 유명인의 전용기를 추적하는 '셀러브리티제트'의 항공편 트래킹 데이터 1500개를 활용해, 올해 초부터 지난달 20일까지 유명인들 소유 비행기가 배출한 이산화탄소량을 집계했습니다. 이들이 지구에 쏟아부은 이산화탄소는 1인당 평균 3376.64톤(t)에 달했습니다. 이는 일반인이 한 해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평균치의 약 482배가량입니다.


그러한 셀럽 중에서도 독보적인 인물이 바로 미국 팝스타인 테일러 스위프트였습니다. 그는 측정 기간 동안 170회에 걸쳐 비행하며 이산화탄소를 8293.54t 배출했습니다. 다음가는 순위인 미국 복싱 선수 플로이드 메이웨더(7076.8t)의 기록을 훌쩍 웃도는 수치였습니다.


/테일러 스위프트 인스타그램


스위프트의 비행 1회당 평균 소요 시간은 약 80분에 불과했습니다. 특히나 미주리에서 내슈빌까지 이동했던 때의 체공 시간은 고작 36분에 그쳤습니다. 다른 이동 수단을 활용하더라도 충분했을 만한 단거리를 굳이 전용기까지 동원해 가며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스위프트는 이 시기엔 별다른 공연 일정이 없었기에, 불가피하게 비행기를 탔어야 할 만한 사유 또한 드물었습니다. 실제로 그가 탑승했던 전용기는 대개 남자친구 조 알윈이 머무르는 곳을 향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물론 스위프트가 편법을 쓰거나 타인을 착취해 가며 분에 넘치는 사치를 누렸던 것까진 아닙니다. 미국 음악 잡지 롤링스톤이 지난 1월 보도한 바에 따르면 스위프트의 수입은 2021년 한 해 동안에만도 약 8000만달러(약 1044억원)에 달했습니다. 그러한 만큼 전용기고 이산화탄소고 나발이고 간에 열심히 일한 사람이 정당히 번 돈을 합법적으로 쓰겠다는데 굳이 타박을 해야 하나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테일러 스위프트 인스타그램


문제는 스위프트가 과거 지구 온난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낸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난 2020년 미국 매체인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현시대 청년들이 마주하는 주요한 난관으로 총기 사고, 학자금 대출, 기후 변화를 꼽았습니다. 우리 삶의 터전이 급격히 더워지는 현상은 염려하면서, 본인이 현생 인류 중 최상위권에 꼽힐 정도로 이산화탄소를 뿜어내는 행태는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이죠. 그것도 비행기를 무슨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굴리는 것도 아니고, 남자친구나 조금 더 빨리 만나 보려는, 생태계 전체가 처한 위기에 비하자면 시답잖은 용무에 쓰면서 말이죠. 그러한 탓에 2019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이어졌던 호주 산불 사태 당시 거액을 기부했던 선행마저 오히려 ‘손수 망치고자 지구를 가꿨다’며 조롱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스위프트의 대변인은 "테일러의 전용기를 정기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대여한다"며 "비행 책임을 전적으로 스위프트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고 항변했습니다만. 사람들은 “빌려준 비행기에선 이산화탄소가 안 나오기라도 하더냐”며 받아쳤죠. 더군다나 스위프트는 언론 보도로 인해 논란이 불거진 직후인 지난 7월 30일(현지 시각)에도 태연히 전용기를 기동해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셀러브리티제트의 추적에 따르면 이날 그가 탄 비행기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뱅크를 떠나 뉴욕주 올버니에 착륙했고, 4시간 17분을 나는 동안 연료 6169리터를 태우며 이산화탄소 17톤을 배출했습니다.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 이른바 ‘ESG’를 고려하는 경영 행보나 생활 방식 자체야 어떻게 보더라도 비판을 초래할 만한 일은 전혀 아닙니다. 건전한 경제 활동을 위해 윤리와 연관된 비재무적 요소를 충분히 고려하며 움직이겠다는데 환영을 했으면 했지 시비를 걸 이유는 딱히 없으니까요. 오히려 그런 것을 다 무시하고선 수익 극대화에만 치중하겠다는 쪽을 악의 무리로 규정하고 경계하는 편이 이치엔 차라리 맞겠죠.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테일러 스위프트의 사례와 같은 상황입니다. 대외적으론 친환경이나 공정사회 이룩 등을 힘주어 외쳤던 사람이, 알고 보니 표방하던 신조를 돌아선 자리에서 짓밟고 있었던 경우 말이죠. 물론 그 누구라도 소신을 천날 만날 오롯이 지키긴 결코 쉽지 아니합니다만. 여건이나 사정이 어쩔 수 없어 잠시 깼던 정도면 모를까, 공개적으로 천명했던 신념을 그저 본인의 편의나 이득 때문에 태연히 저버리면 지탄을 면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테면 도이체방크 자회사인 자산운용사 도이체자산운용(DWS)은 지난 2021년 3월 운용하는 전체 자산 약 9000억유로(약 1208조원) 중 4590억유로(약 616조원)를 ESG 기준에 따라 투자했다고 밝혔는데요. 이들은 당시 “ESG는 투자자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며, DWS의 ESG 기준은 업계 평균 이상이다”고 홍보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3월 DWS 전임 ESG 책임자였던 데지레 픽슬러는 “ESG 기준에 적합한 펀드는 극히 일부에 불과한데도 회사가 자의적으로 ESG 상품으로 분류해 실적을 부풀렸다”고 폭로를 해 버렸습니다. 


독일 당국이 조사를 개시하자 DWS 주가는 단 하루 만에 14% 가까이 폭락했습니다. 검찰은 DWS그룹이 내놓은 펀드 중 상당수가 실제 판매 계획서에 기재된 내용과 달리 ESG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DWS그룹에서 내놓는 모든 신규 투자 상품이 ESG 펀드가 될 것”이라 공언했던 아소카 뵈르만 CEO는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요. 


스위프트의 경우와 좀 더 유사한 사례로는, 영국 매체인 더 타임스가 지난해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 참석한 각국 정부와 기업계 지도자들을 향해 날렸던 비판을 들 수 있겠습니다. 더 타임스는 당시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시간당 2톤씩 뿜어내는 전용기 400여 대가 글래스고에 도착했다”며 “위선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글래스고 하늘을 메운다”고 보도했습니다.


특히나 영국 총리인 보리스 존슨은 주최국의 수장으로서 연설하며 “기후변화 지구 종말 시계는 자정 1분 전”이라는 취지의 언급까지 했음에도, 바로 이틀 뒤 전용기를 타고 이동하는 바람에 제1야당인 노동당으로부터 “위선자”라는 욕을 얻어먹고야 말았습니다. 미국 매체인 뉴욕포스트는 “총리는 이런 비판을 의식해 일주일 뒤엔 기차를 이용했지만, 그때에도 글래스고 역에 도착한 직후 일부 청중이 보내는 야유를 피할 수는 없었다”고 전했습니다.


마크 카니 유엔기후행동 금융 특사(왼쪽)와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COP26 홈페이지




데이비드 랜드 예일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이 지난 2017년 발표한 'Why do we hate hypocrites?(우리는 왜 우리는 위선자를 혐오하는가)’ 논문에 따르면,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보다 위선자에게 거부감을 더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이 참가자 619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한 결과, 규율을 자주 위반하던 사람이 난처한 상황을 거짓말로 모면하려 드는 꼴을 볼 때보다, 평소 도덕적인 발언과 언행일치를 강조했던 사람이 부도덕한 행위를 자행하는 상황에 한층 더 심한 분노를 표했다는 것입니다.


연구팀은 "사람들은 위선자가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가 과거 원칙을 내세워 도덕적인 사람으로 위장했기 때문에 분노를 표했다"며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자 타인에게 도덕적인 비난을 일삼았던 사람은 거짓말쟁이보다 더한 악당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고 설명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는 ESG에도 적용될 수 있는 논리입니다. 차라리 일절 말을 않았던 회사라면 모를까, ESG의 가치를 중시하는 양 홍보하던 기업이 실제론 그 무엇보다도 자사의 이익을 우선했던 것으로 드러나면 위선자라는 오명과 그에 뒤따를 역풍을 무탈하게 비껴가긴 쉽지 않겠죠. 물론 ESG의 가치를 완벽히 실천하면서도 꾸준히 수익을 낼 수 있다면야 그보다 더 좋은 것도 없겠습니다만. 그렇게 해내는 것이 말만큼이나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렇기에 비록 ESG가 현시대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로 꼽힐지라도, 시종일관 준수할 능력이나 의지가 부족해 언젠간 결국 ‘그린워싱’(위장환경주의) 등의 논란을 초래할 리스크가 있다면, 애초부터 발을 들이지 않는 편이 장기적 견지에선 오히려 유리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ESG라는 것도 경제 주체가 이윤 극대화를 겨냥하며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방침의 일종이지, 처한 조건이나 예상되는 결과에 상관없이 무조건 지켜야만 하는 정언명령급 철학까진 아니니까요. 세계 최대 자산 운용사 블랙록의 창립자이자 CEO인 래리 핑크가 올해 초 발표했던 연례서한에서 규정했듯 말이죠. "ESG는 이념적 의제나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주주와 회사가 상호 유익한 관계를 추구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힘이며 수단이다.”



더욱 많은 이야기가, '오늘도 출근중'에서 독자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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