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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웅 Aug 29. 2022

팀원이 천재라도 못난 상사는 필요해요

난, 팀의 주역이 아니라도 좋다

"감독님은 저를 이해해 주는 분입니다. 감독님과 함께 노력하고 싶습니다. 저를 대표팀에 발탁해 주시면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지난 7월 18일(현지 시각) 미국프로야구(MLB) 올스타전을 하루 앞두고 열렸던 미디어 인터뷰에서,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선수인 오타니 쇼헤이는 내년 3월에 열리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출전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당연히 나가고 싶다"며 위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타니 쇼헤이 인스타그램


오타니가 여기서 언급한 ‘감독’은 곧 현재 일본 야구 대표팀 지휘봉을 쥔 리더인 구리야마 히데키를 가리킵니다. 2012년부터 2021년까지 일본프로야구 니혼햄 파이터즈 감독을 맡았던 구리야마는, 오타니가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니혼햄에서 뛰는 동안 그를 지도했던 인연이 있다 합니다.


현역 야구 선수 중 제일가는 천재를 누구를 꼽을지는 이견이 존재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어떤 평론가가 랭킹을 매긴들 오타니가 다섯 손가락 밖으로 나가는 일은 드물 것입니다. 투수와 타자의 분화가 상당히 진행된 현대 야구판에서, 두 포지션을 동시에 소화하며 양쪽 모두 호성적을 내기까지 하는 걸물은 오타니 이외엔 전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지난 2021 시즌에 만장일치로 아메리칸 리그 MVP에 선정됐던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닌 셈이죠.


구리야마 감독은 그에 비하자면 차라리 일반인에 가까울 수준입니다. 현역 시절엔 범용했던 선수로서의 실력보다는, 도쿄학예대학 졸업이라는 프로 스포츠맨 치고는 뜬금없을 정도로 괜찮은 학력 쪽이 오히려 더 주목을 받았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럼에도 그는 대표팀 감독으로서 일본 최고의 야구 선수들을 통솔하는 것은 물론, 오타니라는 희대의 천재에게 공경 받는 영광을 누리고 있죠. 그렇게 된 배경엔 어떠한 사연이 있냐 하면요.




비단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같은 창작물 속 캐릭터가 아니더라도, 천재 소리를 듣는 인물은 보통 사람으로선 짐작하거나 헤아리기 힘든 행동을 꽤 하는 편입니다. 앞서 언급한 오타니만 해도 고교를 졸업할 즈음, 본인의 타고난 재능을 믿고선 전례 없던 ‘MLB 직행’과 ‘투타 겸업 보장’을 강경히 요구하며 당대 업계의 통념과 상식을 정면으로 들이받아 버렸는데요.


당시 일본엔 전례가 없던 고등학교 졸업 후 MLB 직행 도전도 상당한 파격이었지만요. 투타 겸업은 그보다도 한참은 더 황당한 기행 중의 기행이었습니다. 설령 투타 전부에 재능이 남아돌더라도, 투수와 야수는 운동 방향성이 판이하게 다른 만큼 두 포지션에 모두 적응하려면 엄청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체력적인 뒷받침 없이는 포텐셜이 암만 훌륭할지라도 개화를 기대하긴 요원할 수밖에 없었죠. 식물로 치자면야 줄기가 마르거나 영양이 끊긴 꽃봉오리를 틔워 보려는 행위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러나 내딛는 도전의 거대함에 비해 오타니가 당시 구비해 둔 체력은 하찮은 수준에 불과했죠. 일본 야구계의 원로이자 평론가인 장훈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오타니도 하나에만 집중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말했던 바가 있고요.


하지만 오타니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요구 관철을 고집했습니다. 어쩌면 ‘체력 없인 이도 저도 아니다’는 상식 따윈 평범한 사람에게나 통할 만한 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죠. 만일 오타니가 이때 곧장 미국으로 건너가 겸업을 시도했다면, 세간에서 우려했던 바와 같이 스태미나 부족에 허덕이다 투타 어느 쪽에서도 두각을 내지 못하고선 ‘가능성만 굉장했던’ 실패한 영재 중 하나로 역사에 남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천재 오타니’가 이러한 운명을 피하고선 재능을 온전히 만개한 배경엔 ‘범용한 인간’인 구리야마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구리야마를 위시한 니혼햄 관계자들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오타니를 설득했습니다. 당시 일본엔 프로구단의 지명을 거부하고 미국에 진출한 케이스가 단 하나도 없었던 관계로 한국 사례를 대신 분석해, 2006년 이래 21명이 미국에 직행했으나 MLB엔 한 명도 올라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오타니에게 보여줬던 것입니다.


/구리야마 히데키 공식 홈페이지


니혼햄은 자료에서 드러나듯 ‘일반인’의 ‘천재’ 오타니 염려에도 합당한 이유와 근거가 상당하며, "빠른 진입과 장기간에 걸친 활약은 별개 문제이므로 (데이터로 판단하건대) 톱클래스로 활약하려면 일본에서 뛰고 나중에 미국에 가는 게 낫다"는 권유를 했습니다. 오타니는 30페이지에 걸친 분석 결과를 읽고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이 많다”는 반응을 보였고, 결국 미국 직행을 철회하며 니혼햄 유니폼을 걸치기에 이르렀습니다.


구리야마 감독은 또한 오타니가 꿈꾸는 투타 겸업을 실현해 주기 위해, 스스로의 재능에 경도된 천재가 놓치고 있던 약점을 집중적으로 보완해 나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체력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지요. 실제로 그는 오타니의 입단 기자회견에 동석해 “구역질이 나고 구토를 할 때까지 훈련을 시킬 것"이라 선언했습니다. 오타니의 훈련 페이스를 따라가지 못해 그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상황을 피하고자 구리야마 본인부터가 눈 덮인 뒷산을 오르며 체력을 다져 두기까지 했고요.


이러한 지원 덕에 오타니는 결국 MLB 진출이라는 오랜 비원을 안정적으로 달성한 데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로도 투수와 타자 양면에 걸쳐 활약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미국으로 건너가기에 앞서 고별 인터뷰를 하던 날,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는 것이 팀 그리고 일본 야구 전체로 봤을 때 과연 도움이 되는 것일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구리야마 히데키 감독을 비롯한 구단 관계자와 따뜻하게 응원해 준 팬들 덕분에 매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므로 정말 고마운 마음뿐이다”며 ‘스승’에게 공개적인 감사를 표했던 것입니다.


/오타니 쇼헤이 인스타그램




‘천재 한 명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2002년 동아일보 인터뷰)’는 말에는 분명 틀린 부분이 없습니다만. 그렇다 해서 천재만 긁어모아 둔 조직이 늘 승승장구하며 훌륭한 아웃풋을 내는가 하면, 의외로 그것에 대해선 반드시 그러하리라 장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천재의 탁월한 영감이 소중한 자산이긴 하지만, 적절한 보좌나 통제 없이 폭주하는 재능은 일반인의 사고 범위를 훌쩍 넘어서는 점을 향해 치닫다, 결국엔 동력을 잃는 시점에 제풀에 지쳐 고꾸라지거나 웬만해선 이해 못 할 기괴한 산출물을 내놓고선 외면당하기 마련이거든요.


‘추격자’, ‘황해’, ‘곡성’ 등 연출을 맡은 모든 장편 영화가 칸 영화제에 초청된 유일한 한국인으로 이름난 나홍진 감독을 예로 들자면요. 데뷔작인 ‘추격자’의 원래 엔딩은 두 주인공이 여성의 조각난 시신을 들고 최후의 대결을 펼치는 것이었다 합니다. 탄탄한 플롯을 유지하면서도 잔혹한 연출을 가미하는 데에 재능이 상당하다 정평이 난 나 감독인 만큼 그러한 씬에도 물론 나름의 미학과 메시지는 존재했을 테지만요. 취향이 표준적이었던 제작자와 배급사는 상궤를 벗어나는 고어한 장면에 기겁해 엔딩을 바꿔 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아시는 바와 같이, ‘추격자’는 평론가와 대중에게 상당한 호평을 받고 흥행 측면에서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뒀죠.


‘시신 격투’ 장면은 이미 촬영까지 끝내 영화에 들어간 상태였다 합니다./네이버 영화 ‘추격자’ 스틸컷


다만 나 감독만큼은 이때 연출 수위를 낮춘 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차기작인 ‘황해’에선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잔인한 묘사를 아주 성에 차도록 가감 없이 털어 넣어 버렸는데요. 그 반동으로 연말 주요 관객인 ‘20대 여성’이 이탈해 버리는 바람에 결국 막을 내리는 순간까지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습니다. 천재의 예술혼을 일반인이 어느 정도 억눌렀던 ‘추격자’ 쪽이, 천재가 재능을 마음껏 발산해 버린 ‘황해’보다 성적은 되려 좋았던 셈입니다. 영화의 작품성이 전적으로 흥행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요. 상업영화 입장에서야 감독의 천재성이 대중의 취향과 조금 더 타협해 줬다면 좋았으련만 하는 아쉬움은 아주 지워 내기 어려울 수밖에 없죠.




텍사스대학 샌안토니오캠퍼스 건강 센터 산하 의과대학장으로서 교직원 1300명과 의료진 3000명, 수련의 800명을 이끄는 로버트 흐로마스는, 그의 아들이자 플로리다대학 건강 센터 프로젝트 매니저인 크리스토퍼 흐로마스와 함께 집필한 저서 ‘아인슈타인의 보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천재를 이끄는 데에는 천재 아닌 사람이 더 적격일 수 있다.”


흐로마스는 “리더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소통 능력, 정직, 팀에 대한 배려 등 '감정이입 능력'이다”며 “이 방면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천재보다 오히려 나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가 저서에서 예로 든 인물은 프린스턴고등연구소 설립자인 에이브러햄 플렉스너입니다. 플렉스너는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노벨상 수상자 33명과 필즈상 수상자 38명을 지휘했지만, 정작 그는 휘하에 둔 기라성 같은 석학들에 비하면 학자로선 한 수 아래 급에 있었다 합니다.


저서를 통해 흐로마스는 “플렉스너의 업적은 우수한 수학자, 물리학자들에게 자유를 허용하고 심적으로 지지하며 최상의 연구 환경을 조성한 것”이라며 “머리를 통제하지 말고 가슴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감정에 공감할 때 천재들은 리더를 진정으로 존중한다”고 조언했습니다.


본인이 품은 재능 자체야 대단치 않더라도, 우수한 타인의 역량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춘 동시에 일반인으로서의 상식도 확고해 천재의 마구 튀는 발상을 평범한 사람들의 눈높이로 맞춰 살려 주는 스타일의 리더가, 천재 무리를 이끌기엔 천재보다도 오히려 훨씬 적합하다는 것이죠. 물론 포용력이 뛰어나면서도 범속한 사람들의 지식수준까지 고려해 주는 천재라면 이야기가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천재도 흔치는 않은 판에 그런 덕목까지 겸비한 천재는 더욱이나 희소할 테니 차라리 논외로 두는 수밖에요.


천재들을 모은 팀에도 못난 상사가 하나쯤 필요하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입니다. 제각기 잘난 인재들을 중재하며 다독이는 동시에, 걸핏하면 폭주하는 혁신적 아이디어를 현실에서 받아들일 만한 선으로 조절하는 역할까지 넉넉히 해 주는 리더라면, 개성 넘치는 천재들이 득실대는 팀의 지휘자로서 그보다 더 어울리는 인물이 또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농구 천재들이 페이지마다 난무하는 스포츠 만화 ‘슬램덩크’에서도, 능남의 주장 변덕규는 이와 같이 읊조렸던 것이겠죠. “우리 팀엔 점수를 따낼 수 있는 녀석들이 있다. 내가 30점 40점을 넣을 필요는 없다. 난 팀의 주역이 아니라도 좋다.”


‘슬램덩크’ 中./대원씨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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