뿅가죽네!
히로유키(ヒロユキ)라는 필명을 쓰는 일본 만화가가 있습니다. ‘萌え死ぬ’를 ‘뿅가죽네’로 옮긴 번역이 국내 인터넷상에서 꽤나 히트했던 덕에 이따금은 우리나라에서만 유명했던 인물로 오해를 받는 때도 있지만요. 사실 최근 연재작인 ‘그녀도 여친(カノジョも彼女)’만 해도 지난달까지 무려 170만부 이상을 팔아 치우는 등, 자국 기준으로도 이래저래 중견 이상 대우는 넉넉히 받을 만한 흥행 작가이긴 합니다. 전작인 ‘바보걸’을 비롯해 애니메이션화된 작품만도 벌써 4개에 이르니까요.
아무튼 그가 지난달 7일 본인의 트위터를 통해 ‘일본 출판계의 문제 중 하나를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고 밝혔습니다. 그것은 바로 현지 업계에선 통상적인 관행으로 통하는 ‘무료 색지’ 이슈였습니다.
‘색지’란 만화가나 일러스트레이터가 인쇄 등 대량생산 방식을 거치지 않고 수작업으로 직접 그려낸 그림을 뜻합니다. 유일성을 보장하고자 제작자와 수령인의 이름까지 적어 넣는 것에 기인해 ‘사인색지’라 불리기도 하고요. 일본에선 거의 고유명사화돼 색이 없는 러프 스케치마저도 색지로 통할 정도죠. 수작업에 극소량 생산이라는 점이 겹쳐 경매에서 한화 1000만원 이상으로 거래되는 경우마저도 아주 드물진 않은 편인데요.
문제는 일본 출판업계에선 색지엔 고료를 지급하지 않는 관행이 보편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정산을 해 주는 출판사가 아주 없진 않았지만 예외로 쳐야 할 정도로 극소수에 불과했죠. 혹여나 작가가 원고료를 요구하려 들면 도리어 돈에 환장한 사람 취급을 하며 매도하는 상황도 다반사였고요. 그렇기에 만화가 대부분은 빡빡한 연재 스케줄에 치이는 와중에도 무급으로 색지까지 그려 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로유키 작가 역시 지난 9월에 ‘그녀도 여친’ 12권을 발간하며 고료 없는 색지 작업을 요구받았는데요. 그는 출판사의 요청에 응하는 대신 한 가지 시도를 덧붙였습니다. 판촉에 쓸 상품은 복사본으로 납품하되, 직접 손으로 그린 원화 색지 4장은 경매에 부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넘긴 색지엔 히로유키 사인은 물론 수령인 이름도 같이 기록해, 출판사 납품본과 차이를 두는 동시에 되팔이도 어느 정도 방지했고요.
작가의 수입원은 개척할 수 있을지언정 출판사에 제공한 버전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지라 클라이언트의 원한을 사기 십상인 도박수였는데요. 그나마 업계에서 인지도와 입지가 어느 정도 경지에는 이른 히로유키였기에 총대를 메고서 도전해 볼 수 있었던 것이죠.
결과적으로 그가 경매에 내놓은 색지 4장은 14만1000~17만8000엔(한화 약 137만~173만원) 사이에서 모두 낙찰됐습니다. 총액은 640만엔. 대략 620만원 정도를 벌어들인 셈이죠. 히로유키는 본인의 트위터를 통해 “실험 결과를 보고한다, 구입하신 분도 무척 기뻐해 개인적으로는 매우 잘했다 생각한다”며 “이런 기획을 반복하면 향후 가격은 다소 내려가겠지만 그럼에도 메리트는 있다고 본다”는 소감을 밝혔습니다.
히로유키가 이러한 시도를 거듭할 계획임을 트위터에서 시사한 만큼, 색지 경매는 적어도 몇 차례는 더 반복될 예정입니다. 물론 명성이 덜하고 입지가 불안한 후배들이 당장 색지 경매에 동참하기야 어렵지만, 그래도 이러한 히로유키의 선도로 ‘색지는 공짜 납품이 상식’이라는 관념 자체가 흔들린다면 업계에도 상당한 변화가 도래할 전망입니다. 히로유키와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평가받는 작가들이 이에 동참한다면 지각변동도 한층 더 이르게 오리라 기대할 수 있겠죠.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지난해 10월 발표한 ‘2021년 갑질종합지수’와 관련해 우리나라 직장 전반의 종합평가등급을 C- 레벨로 지정했습니다. 갑질종합지수란 일터에서 겪는 불합리한 처우의 심각성을 50개 지표로 수치화한 것입니다. 그러한 점수가 평균을 밑돌아 D에 근접함은 곧, 아직도 한국 사회엔 부조리나 불공정이 상당한 수준으로 만연해 있음을 시사합니다.
곳곳에 뿌리내려 여러 세대를 오래도록 거친 저열한 관행은 얼핏 보기엔 너무나도 단단히 굳어져 파낼 방도조차 달리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토록 억세게 박힌 듯한 악폐습마저도 윗선의 본격적인 의지나 오피니언 리더의 입김이 닿으면 의외로 쉽게 녹아내리는 꼴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모델계는 한때 불합리한 군기 문화로 악명이 높았음에도, 송경아나 장윤주 등이 선배 반열에 오른 이래 구습 척결에 적극 나서자 업계 풍토가 오래지 않아 긍정적인 방향으로 개변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죠.
즉, 조직 내에서 우위에 있는 분들이 ‘원래 그런 것이다’, ‘이제 와 무시할 수는 없는 전통이다’, ‘개인의 힘으로 바꿀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며 마지 못한 듯 자행하던 유서 깊은 부조리일지라도, 송경아와 장윤아가 우리나라 모델계를 바꿨듯, 그리고 히로유키가 일본 출판계의 관행을 헤집듯, 역량과 지위가 충분한 인물이 앞장을 서면 변혁을 꾀할 길은 얼마든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죠.
지난 14일 두산 감독으로 취임한 이승엽은 해설위원 시절 “불가능은 없다, 힘들 뿐”이라는 명언을 남겼었죠. 부적절한 관행의 타파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조직이나 집단 내의 부조리 역시 손쓸 도리가 없다는 명분을 들며 마냥 방치하려는 태도는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권능과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앞장서 개혁을 주도한다면, 어느 정도의 난관이야 불가피할지언정 아예 이룩하지 못할 만한 일은 그리 흔치 않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