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아이들에겐 나름의 성역이 있다. 나는 그것을 침범했다.
우두커니 홀로 앉은 나는 한참을 곰곰이 생각했다. 전달받은 약속 시간엔 어긋남이 없었다. 장소 또한 문방구 앞 평상이라는 사실을 몇 차례나 확인했다. 암만 되짚어 본들 안타깝게도 나는 틀리지 않았다. 내리고 싶지 않았지만 내릴 수밖에 없는 결론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오지 않은 것이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적어도 그 시간과 장소에는.
답을 찾은 이후로도 한동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오늘은 주말이다. 집에는 부모님이 계신다. 예정대로였다면 오늘 모인 아이들과 더불어 향할 곳은 시내였다. 못해도 편도 버스로 한 시간은 걸리는 곳이다. 지나치게 일찍 들어서면 그 사이에 벌어진 일을 사리에 맞는 방향으로 설명할 방도가 없다. 부모님께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았다. 다시 평상 위에 쪼그려 앉은 나는, 시간이 서둘러 흐르길 바라며, 일이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지를 조용히 되짚기 시작했다.
"쟨 무서워요. 말을 어렵게 해요. 생각도 이상하고요."
선생님이 학급 내 교우관계를 조사하는 때, 아이들이 나를 가리켜 자주 했던 말이라 한다. 나는 반대로 아이들이 답답했다. 30명 넘게 모여 앉은 학생 중 '부정'의 반대말이 '긍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나 혼자 뿐이라, 선생님께 칭찬을 받는 상황 자체가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나 역시 눈치나 예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친화력이나 거리감 조절이 탁월하진 않았을 뿐, 적어도 책에서 알려 주는 지식 선에선 사람 간에 지켜야 할 법도나 범절 정도는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또래를 노골적으로 무시한다거나 폄하하는 식의 망발은 딱히 저질렀던 바가 없었다. 도리어 하굣길 방향이 같은 급우와 아폴로 과자를 나눠 먹고, 서로 간에 없는 게임 CD를 빌려 쓰는 수준의 평범한 교류는 언제고 잔잔하게나마 지속해 왔다. 내심 그런 활동마저도 귀찮다고 생각했던 때가 잦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서 그러한 속내를 굳이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나는 역시나 영리한 아이였다. 어떠한 언행이 나의 일상에 유리한 방향으로 작동할지는 머릿속으로 충분히 그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균열은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지점에서 발생했다. 몸 쓰는 활동을 선호하지 않는 나였지만, 또래들이 학교에서 벌이는 축구 경기에는 거의 매번 참가하는 편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주먹 좀 쓰고 체육을 좋아하는 이른바 '일진 그룹'들은 그라운드에서 공격수로 활약할 본인들을 돋보이게 해 줄 나머지 포지션을 늘 필요로 했다. 스트라이커 이외 잔여물들의 임무는 단순했다. 공격수 주변으로 달라붙는 타 팀 선수들을 몸으로 밀어내거나, 어떤 식으로든 공을 잡게 되는 순간 상대 골문 쪽을 어슬렁거리는 일진에게 신속한 패스를 날리는 정도뿐이었다.
나는 활동량 자체는 매우 적었지만, 동네 담벼락에 홀로 공을 차는 놀이만큼은 꽤 어릴 적부터 거듭해 왔기에, 타깃을 향해 슛을 하거나 패스를 찔러 넣는 실력만큼은 동년배 기준으로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일진들이 축구를 한답시고 판을 벌이는 날엔 머릿수를 채우는 용도로 소환당하는 때가 흔했다. 인간관계에 나름 신경은 쓰고 있던 나는, 설령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은 날이라 해도 웬만해선 티를 내지 않으며 부름에 동참했다.
그리고 유달리도 나를 향해 공이 자주 오던 날 일은 벌어지고야 말았다. 원만한 학교 생활을 바란다면 철저히 조역에 머무르며 일진 무리를 향한 패스 보급이나 적당히 해 주는 편이 유리하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나이로 치더라도 한 자릿수에 불과했던 국민학교 1학년 남자아이에게, 차면 곧 상대 골대로 빨려 들어갈 각도가 바로 보이는 순간, 때마침 날아온 공을 타인에게 순순히 넘겨주는 자제심 발휘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발을 갖다 대는 찰나 공은 역시나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일순간 몰려든 싸늘한 정적이 상대는 물론 우리 팀까지 온통 휩쓸어 덮었다.
결과는 3대 2, 우리 팀 승리였다. 하지만 경기가 마무리된 순간 상대 팀 중 하나가 외쳤다.
"야, 너희 골 하나 빼. 오늘은 홍철이가 너희 쪽에서 뛰었잖아. 홍철이 있었음 우리가 이겼다."
"오케이. 2대 2. 비긴 거다."
빠진 골은 당연히 내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네 질서 바깥에서 비롯한 성과로 승리를 거두느니, 차라리 그것을 부정하고 무승부를 기록하는 길을 택했다. 상위 카스트의 위신을 조금이라도 훼손한 이단아를 방치했다간 장기적으론 그룹 전체의 위엄이 무너질 우려가 있다는, 제법 장절한 정치적 고려를 그들은 어린 나이였음에도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선 자신들만이 빛나야 할 성역에 분별없이 흙발로 들어온 나를 향해선 오래도록 이어질 보복을 나지막이 예고했다.
"깝치지 마라. 너 또 축구하러 오면 죽여 버린다."
경고는 학급 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루어졌다. 질서를 깨뜨린 불한당에겐 그에 상응하는 보복이 따른다는 사실을, 그들은 공개된 자리에서 널리 알려야 할 필요가 충분했을 것이다. 더불어 그것은 나와 얽힌 모든 것은 학창 생활이 즐거울 수 없으리라는 명백한 위협이기도 했다.
그간 소수나마 엷은 수준의 교류를 이어가던 아이들마저도 이를 기점으로는 더 이상 내 곁에 다가오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그들에겐 잘못이 없다. 질서가 힘에 의해 왜곡되는 때, 그것을 바로잡을 책임을 아이들에게 지워선 안 된다. 미성년은 그런 존재다. 달리 말하자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책상이나 교과서에 욕을 적어 놓는다거나, 보고 있는 책을 뺏아 던진다거나, 책상 사이를 지나갈 때 발을 내밀어 다리를 건다거나, 수업 중 선생님 지시로 책을 읽을 때 특징적인 말투나 잘못 읽은 부분을 흉내 내며 비아냥거리는 행위는 어른들이 노련하게 제지해 주었어야 옳다.
물론 교권이 돌아가는 그 모든 상황을 아주 손 놓고 지켜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아이의 세계는 어른이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영악하고도 잔혹하다. 주동자 몇몇을 내 앞으로 불러 모아 이제 그만하고 친하게 지내, 자 악수! 라고 말하는 정도로는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일진들이 내 손을 움켜쥐는 순간 날아온 그들의 눈빛보다, 심드렁히 우리를 바라보던 선생님의 표정이 더욱 기억에 선명하다. 어쩌면 선생님 역시 애초에 충분히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눈앞에 선 아이들은 겉보기보다 훨씬 교활하고도 때 묻었음을. 그렇기에 그 정도 요식행위 만으론 결코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는 것을. 단지 나를 위해 그 이상의 무언가를 굳이 하고 싶지 않았을 뿐.
"야, 너 이번 주 토요일 날 하는 거 없지? 우리랑 시내 놀러 가게, 열한 시까지 문방구 앞으로 와."
그 직후 일진 무리로부터 들어온 제안이 바로 그것이었다.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이 또한 새로운 갈취나 괴롭힘의 발단이 될 수 있는 이벤트라는 것을. 그러나 나는 이미 충분히 지쳐 있었다. 상황을 풀어 나갈 실마리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감행할 마음이었다. 잊지 않도록 메모지에 꾹꾹 눌러 적고, 부모님께 말씀드려 용돈도 충분히 받았다. 혹시라도 늦은 탓에 무슨 빌미가 잡히기라도 할까 봐 약속 장소에는 1시간 먼저 가 있었다. 그리고는 집을 향한 발걸음을 떼기까지 5시간을 홀로 머물렀다.
문방구에서 집까지 걷는 데에도 한 시간은 족히 걸렸다. 서러움과 걱정이 가득 들어찬 속에선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대다. 시간과 장소에 관한 증거라곤 내가 적은 메모뿐이다. 나 이외 아이들이 작정하고 말을 맞추면 그깟 종이 쪼가리엔 아무런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 선생님이나 같은 반 아이들한테는 그들이 놀자고 불렀으나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안 나왔다고 퍼트리면 그만이다. 나는 한층 더 기괴하고 무례한 별종이 될 것이다. 앞으로의 학교 생활은 지금까지 이상으로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여덟 살 나는 앞으로의 인생이 두려웠다. 지엄한 국법에 의거해 피해 가지도 못할 남은 의무교육의 나날들이 너무나도 무겁게 다가왔다.
며칠 뒤, 어머니가 지나가는 듯한 말로 내게 물었다.
"저번에 토요일에 애들이랑 같이 시내 갔을 때, 혹시 애들 돈 쓰는 거 봤니? 엄마들 이야기 들어 보니 그날 10만 원이나 쓴 애가 있다고 하더라. 뭘 했길래 1학년 짜리가 그렇게 썼대니?"
나는 글쎄요, 라는 대답 외엔 할 수 있는 말이 달리 없었다. 다만 그것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들끼리는 어쨌든 모여 놀긴 놀았다는 것을. 단지 내게 알리지 않았던 어느 때의 어딘가였을 뿐.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