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선배가 박살 낸 쓰레기통

네 인생은 너의 것

by 문현웅

여느 동아시아 고등학교가 그렇듯, 제 모교에도 수많은 유적지와 거기에 수반한 다채로운 전설이 존재했습니다. ‘서울대 선배가 박살 낸 쓰레기통’도 그중 하나였는데요. 서울대에 합격해 진학했던 선배가 돌연 학교로 찾아와 원서를 써 줬던 선생님과 말다툼을 벌이더니 분을 참지 못하고 쓰레기통을 걷어차 부쉈다, 대략 그런 내용의 설화였습니다.


무려 서울 내셔널 유니버시티를 뚫어준 은사께 그 무슨 망발이냐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문제는 그가 진학한 학과가 ‘독어교육과’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선배에게 독일어 혹은 독어교육과를 비하하거나 모욕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단지 독어교육과의 커리큘럼을 충실히 따르는 동시에, 그가 본디 바랐던 상경 계통 진로를 더불어 걷기가 너무나도 버거웠을 뿐이었다 합니다.


서울대.png /서울대학교


다들 고교 재학 중 입시 면담을 몇 차례 해 보셨을 테니, 그럴 거면 독어교육과를 왜 갔는데? 라는 의문은 딱히 품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사, 나아가 학교의 가장 대표적인 대외 실적 척도는 ‘명문대 진학자 수’였고요. 그러다 보니 제법 우수한 아이들이 선생님께 붙들려 성적에 비해 허들이 낮은 SKY 학과를 반강제로 지원하는 일도 흔했습니다. 사회에선 대학 간판이 훨씬 중요하며, 지망하는 학과는 나중에 전과나 복수전공으로 택하면 된다는 것이 가장 주요한 설득 레파토리였죠.


하지만 선배는 진학 후 뒤늦게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등록금을 납부한 순간 진로는 이미 크게 틀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말이죠. 사범대는 학칙상 같은 단과대 내에서만 학과를 바꿀 수 있었고, 그나마도 학과를 정해 입학한 ‘전공예약제’ 학생은 전과를 아예 금지해 두고 있었습니다. 경제학으로 전공을 완전히 전환하려면 수능을 다시 치거나 편입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죠.


복수전공도 사실상 불가하긴 매한가지였습니다. 일단 전공 학점을 제대로 따야 졸업이건 취업이건 바라볼 수 있는 상황에서, 외고도 아닌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 졸업자가 독일어를 4년 안에 남 가르칠 정도로 익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요. 더욱이 교직 과목까지 필수로 이수를 해야 하니 그러잖아도 어려운 상경계 과목을 병행해 전공할 여력은 턱없이 부족했죠.


그래도 서울대인데 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때엔 이미 서울대 비상경계에 비해 여타 최상위권 대학 상경계가 취업을 훨씬 더 잘하는 시절이 도래해 있었고요. 그 선배 성적이면 취향에 없던 독일어나 교육학에 붙들리는 대신 다른 명문대에서 원하는 공부에만 매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겠죠. 대략 그러한 울분이 차츰 응어리지다 결국 폭발해 모교를 습격하기에 이르렀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대학에서 고른 전공이나 처음으로 입사한 직장 등, 생애 첫걸음이라 불릴 만한 것들은 대개 그 영향력이 상당합니다. 독어교육과를 택한 이는 상경대학 학생만큼 경제학을 마냥 파고들긴 어려워지며, 사회생활을 기자로 시작한 사람은 경력을 몇 년 쌓다 보면 홍보 직렬 이외엔 갈 곳이 없게 되죠.


그럼에도 그 무게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결정을 쉽사리 내리는 수험생이나 취준생이 그리 드물지 않은데요. 그러다 보니 실리만 챙기고서 책임은 지지 않는 멘토의 감언에 속아 잘못된 길을 택하는 이도 종종 눈에 띄곤 합니다. 이를테면 학생의 장래보다는 본인의 실적 위주로 판단해 원서 제출을 종용하는 교사처럼 말이죠.


요점은, 큰 걸음을 내딛으려는 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본인의 조사와 준비가 가장 철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선배가 서울대 독어교육과를 고르기에 앞서 전과 규정이나 이수해야 할 전공과목 수를 면밀히 살폈다면 굳이 스승 멱살을 잡을 일이 있었을까요. 이득을 보고자 꼬드긴 사람도 물론 문제지만, 자신의 명운을 치열한 고민 없이 덜컥 넘긴 이 또한 분명 잘못은 있지 않겠습니까.


선택은 남이 해 줄 수 있을지언정, 후회는 타인에게 맡길 도리가 없습니다. 진로를 택하는 출발점에 선 분들께선, 부디 자신의 대비가 모자란 탓에 스스로를 후회로 몰아넣는 일만큼은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글은 플랜비디자인의 제안으로 출간된 '솔직히 당신 열정엔 관심 없어요' 서적의 일부입니다.

브런치북을 통해 이어지는 작가의 길은 여러분께도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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