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몰라요
현시대 주니어 사원 대부분이 속한, 1990년대생 전반에 걸쳐 뿌리 깊게 박힌 트라우마를, 여러분께선 혹시 인지하고 계시는지요? 그들의 직장관이나 사회생활 태도가 여타 세대와는 확연히 달라진 근원엔, 흔히 언급되는 팽배한 개인주의나 생활의 일부가 된 디지털 문화보다도, 어쩌면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존재하는데요.
그것은 바로 1997년에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외환 위기’입니다. 당시 초등학생 즈음이던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멸망을 향해 치닫는 붕괴와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비할 데 없이 강인하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처진 어깨를 붙들며 하염없이 우는 모습을 보고서 놀라는 때도 있었고, 늘 사이좋던 부모님이 돌연 악에 받쳐 싸우다 끝내 갈라서는 광경에 충격을 받은 이도 적지 않았습니다.
설령 부모님께선 애써 내색을 않았을지라도, 한스밴드 노래 가사처럼 ‘대낮부터 오락실엔 이 시대의 아빠들이 많았던’ 데다, 텔레비전에선 늘 내일이면 선진국이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하던 정부가 갑작스레 금반지를 모으자며 국민을 독려했으니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고 있음을 감지하긴 그리 어렵지도 않았죠. 게다가 학교에선 교실마다 며칠 건너 하나씩은 집안 사정으로 전학 가는 친구가 있었고, 국가적인 경제난을 이유로 수학여행 취소 통보를 받는 상황도 흔했으니까요. 책상 위에 놓인 국화 한 송이엔 떠난 이를 추모하는 뜻이 담겼음을 당시 처음 알게 된 학생도 꽤 많았고요.
물론 어린아이들만이 그 나락을 견디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연약하고 내성도 부족한 아동 쪽이 같은 충격에도 보다 큰 상처를 받기 쉽죠. “어느 정도 성숙한 아이들은 극도의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사건이 터져도 심리적 불안을 잘 극복하는 편이지만, 나이가 어릴수록 보다 쉽게 상처를 입는 데다 극단적 일들이 그리 흔하진 않다는 것을 이해하기도 힘들다"는 짐 클락 플로리다 주립대 교수의 말처럼요.
이 무렵부터 초등학생들의 주된 꿈이 대통령이나 벤처사업가에서 공무원 혹은 교사로 대거 급선회를 했었죠. 단합과 동지애를 명분으로 아버지를 앗아가 연일 회식과 등산, 체육대회 자리에 내리 앉혀 두던 회사가, 막상 목에 칼날이 닿으니 그토록 가족 같다던 임직원들을 내치는 꼴을 곁에서 생생히 보는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이제 어른이 된 그들은, 과연 ‘운명 공동체’인 직장에 헌신하라는 명제를 아무 심리적인 저항 없이 기껍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1990년대생 전반에 흐르는 회사에 대한 불신과 냉소 기류를, 그저 구제금융 트라우마 하나만으로 설명해 낼 수는 없긴 합니다. 수명을 깎으며 일한들 집 한 켠 얻기 힘들 정도로 노동의 가치가 하찮아진 시대 기조라든가, 자아나 행복을 직장 바깥에서 찾으려 하는 움직임의 확대 등, 따지고 보자면 원인으로 꼽을 만한 변수는 꽤 여럿이긴 하죠.
하지만 아무튼 1990년대생들의 유년기를 헤집으며 그들의 국가·사회를 바라보는 태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국가부도의 날’ 사태가, 그 영향력과 중요성에 비해선 주니어 사원들의 태도를 바꾼 요인 중 하나로 거론되는 빈도가 지나치게 적은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아이들의 기억엔 당시의 충격과 공포가 여전히 선한데도 말이죠.
그렇기에 흔히 젊은 사원들의 마음을 얻거나 소속감을 끌어올리겠다며 윗선 주도로 단합회를 열거나 식사 자리를 마련하는 등의 행위가, 실상 얼마나 효용을 발휘할지가 의문입니다. IMF 이전엔 그런 행사가 없어서 회사가 기우는 때에 직원들을 너절하게 쳐냈겠습니까. 개인의 삶을 희생해가며 증명한 충성과 쌓아둔 유대마저도 정작 위태로운 순간엔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유년기에 이미 목도한 이들에게, 부모 세대가 이미 실패한 전철을 그대로 따라 밟을 마음이 굳이 들겠습니까. 외환 위기 전의 방식을 이름만 살짝 바꾼 답습을 암만 거듭한들, 벌써 역사로부터 배움을 얻어 버린 1990년대생들이 과연 리더들이 바라는 만큼 회사를 신뢰하거나 조직에 몰입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 글은 플랜비디자인의 제안으로 출간된 '솔직히 당신 열정엔 관심 없어요' 서적의 일부입니다.
브런치북을 통해 이어지는 작가의 길은 여러분께도 열려 있습니다.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