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의 시작_여행] '여행뽕'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방랑의 시작_여행] 여행뽕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단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여행뽕'이라는 세 글자의 단어.
여행뽕이란 여행 중 분위기에 취해 눈에 보이는 것들은 더 아름다워 보이고, 기분도 엄청 좋고, 모든 것들이 다 좋게 인식되는 현상, 혹은 지난 여행이 미화되어 무척 그리워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상사병과 같은 마음의 병처럼 말하곤 한다. 흔히 "그때 여행뽕에 취했었어", "요즘 다시 여행뽕이 차오른다."라는 문장에 쓰인다.
10년 전 떠났던 동남아시아 배낭여행 때만 해도 나는 초보 여행자였다. 그때 만났던 여행 고수였던 선배 여행자 언니 오빠들은 내게 "여행뽕 조심해~ 슬기야!"라고 거듭 강조해 말했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겪은 여행뽕 후기들을 이야기해 줬었다. 가장 흔한 여행뽕 증상 중 하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평소라면 감정을 크게 느끼지 않았을 사람인데, 여행 중에는 사랑에 빠지는 게 너무도 쉽다는 것이다. 이미 여행이라는 행위를 하며 한껏 올라와 있는 감정 상태이기 때문에 단순한 낯섦, 새로움을 사랑과 혼동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여행 중에는 커플이 많이 성사되는데, 대부분이 여행뽕에 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행 때 그렇게 마음에 들던 상대방을 한국에 와서 만나니 '내가 왜...?! 내가 도대체 왜 그랬지..??'라는 생각과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든 경험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여행 때 사귀었다가 한국에 들어가서 깨지는 커플들의 대다수는 이 여행뽕에서 깨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해줬다. 이렇듯 여행뽕은 흑역사를 만들기 딱 좋다며 내게 몇 번이나 여행뽕에 취해 마음을 쉽게 열지 말라고 강조했다.
여행뽕의 또 다른 증상으로는, '여행' 그 자체를 너무 미화시키게 된다고 했다. 특히 그때 만났던 30대 후반 한 오빠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오빠는 사람마다 가치를 어디에 두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각기 다르지만 여행에만 20대, 30대를 모두 쏟아부었던 자신의 지난날이 가끔은 후회된다고 말했다. 주변 친구들이 한국 사회에서 자리 잡고, 가정도 꾸려서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면 과연 여행이 자신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반추하게 된다고 했다.
당시 초보 여행자이자 20대 중반이던 내게 선배 여행자들의 이러한 말들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때 나는 그 여행이 마냥 좋았고, 사실 그 선배 여행자들이 내 눈에는 어떤 사람들보다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후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해도 그 마저 멋있게 느껴졌다. 그들이 말했던 것처럼 길 위에서 사랑에 쉽게 빠지고, 젊음을 탕진해서 후회를 할지라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10년이 흐른 지금 돌아보니 그때 내가 언니 오빠의 말이 들리지 않았던 이유가 명확히 보인다. 그때 나는 여행뽕에 심각하게 취해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언니 오빠들이 우려했던 그대로의 길을 걸었다. 마음의 문을 여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나였지만 여행 중에는 달랐다. 나는 너무도 쉽게 '낯섦'과 '설렘'을 헷갈려했고, '다정함'과 '사랑' 그 한가운데에서 갈팡질팡했다. 이러한 혼란스러움 속에서 이미 내 문은 반 즈음 열려있었다. 그렇게 사랑 아닌 사랑에 나는 자주 빠져버렸다.
그리고는 선배님들의 말처럼 한국에 돌아와 나도 똑같은 대사를 했었다.
"내가 왜...?! 내가 왜 그랬지...?????? 왜..??? 뭐 때문에..?"
낯선 길 위에 오랜 시간 있으면서 알게 됐다. '아.. 이게 그때 언니, 오빠들이 말해줬던 흑역사구나..' 불에 태워버리고 싶을 정도의 흑역사는 없지만 그래도 '아.. 내가 단단히 여행뽕에 취했었구나..' 싶은 순간들은 많다.
또한 여행뽕 때문에 놓친 아쉬운 인연도 있다. 서로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을 인연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결국은 '잠시 좋아했던 사람'으로 끝나버린 안타까운 인연들. 다 지났기에 드는 생각이지만 '그때 우리가 여행뽕에 취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을 자꾸만 해보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내 여행뽕은 꽤 오랜 시간 지속이 됐었다. 20대부터 30대 초반까지 내리 여행을 목표로 살았으니 말 다했다. 10년 전 만났던 30대 후반의 그 오빠보다는 길 위에서 보낸 세월은 짧지만 이제야 그때 오빠가 해준 말이 가슴으로 들린다.
세계 방방곡곡으로 훌쩍 떠나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말했다.
"와 정말 대단하다. 멋있다!"
"너의 그 자유로운 삶이 부럽다."
"진정 너의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그때는 나도 그렇다고 믿었다.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삶이 멋지고 자유로운 삶이라고, 이것이 진정한 나 자신을 위한 삶이라고 여겼다. 그 믿음으로 10년을 떠났고, 떠나기 위해 살았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동안의 여행이 내게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은 내 마음에 들어와 감추고 있던 구멍 난 자리를 굳이 굳이 찾아내었다. 여행을 생각하면 난 금세 공허해졌고, 허무해졌다.
이런 나에게 만약 누군가 "여행뽕에 취했던 지난날이 후회되나요?"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솔직히 후회가 안된다면 거짓말이죠. 여행에 내 젊음을 탕진해 버렸다는 게 요즘 들어 조금은 허무해요.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있어요.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저는 똑같이 떠날 것 같아요. 10년 후에 이 결론을 안다고 해도 저는 떠날 거예요.
여행뽕에 취했던 나는 정말 행복했거든요. 사람이 살면서 무엇인가에 흠뻑 빠질 수 있다는 것, 그거 쉬운 일 아니잖아요. 여행 중이었던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예뻤어요. 사람이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하잖아요. 저는 그랬던 것 같아요. 여행 중에는 사랑이 넘쳐흘러서 어딘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게 어렵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난 내가 마음 놓고 사랑을 줄 때 행복해요.
예전에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한다고 하면 그건 운명이라고.
이제 여행이 내 삶에 정답이라고 말했던 여행뽕에서는 헤어 나왔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아요.
그저 여행은 저에게 운명이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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