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의 시작_여행] 20년 넘게 찾아 헤매던 나의 완전한 욕구
[방랑의 시작_여행] 20년 넘게 찾아 헤매던 나의 완전한 욕구
나는 어렸을 때 친척 어른들을 만나면 항상 듣는 말이 있었다.
"어쩜 이렇게 의젓해~ 애어른이네 아주~"
지금 돌아보면 타고난 성격과 엄격했던 엄마의 교육 방식이 나를 일찍 '애어른'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어른들은 날 볼 때마다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라고 말했다. 어렸을 때는 나도 그 말이 칭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부터는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싶었다.
20대가 된 후, 진로 고민을 하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지난 과거를 샅샅이 들쳐봤다. 나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된 아이였던 걸까.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거나 하고 싶은 것들이 있더라도 언제나 나보다는 부모님이나 그때 상황이 먼저였다. 이렇게 내가 아닌 여러 가지를 생각하다 보면 내 마음은 늘 미지근하게 식어버렸다. 한 번도 스스로 원해서, 확 꽂혀서 마구 달려든 적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기란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에는 조금은 뻔뻔하고, 이기적인 친구들이 부러웠다. 만약 나라면 부모님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못할 것 같은데, 그 친구들은 부모님과 싸워서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꼭 해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고 주변보다는 자신의 마음이 우선인 사람들을 닮고 싶었다. 그게 무엇이라도 좋으니 참아지지 않는 마음, 뜨거운 마음을 찾고 싶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길바닥에서 울며 불며 떼를 쓰는 아이가 되고 싶었다.
이랬던 내가 20대 중반이 되어서 처음으로 길바닥에서 질질 짜게 된다. 2014년 초겨울, 한 달 동안 혼자 떠났던 동남아시아 배낭여행을 하던 때이다. 그 여행을 하는 내내, 그리고 여행이 끝나갈 무렵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이런 감정을 느꼈다.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너무 큰 불행이 오려는 걸까? 나 왜 이렇게 행복한 거지?'
'너무 행복해서 두렵다'라는 말은 여느 드라마 대사로나 들어봤던 것 같다. 분명 살아오며 '행복'을 느꼈던 순간은 많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순간을 넘어서서 긴 기간 동안 행복을 감각하고 입 밖으로 뱉은 적은 처음이었다. 24살 인생에 가장 강도 높은 행복감을 느낀 것이다.
실제로 나는 동남아 여행이 끝나는 것이 너무 아쉬워서 출국 하루를 남기고 비행기 표를 찢었다. (저가 항공사 표여서 취소, 변경, 부분환불 모두 불가능했다.) 그때 새로운 비행기 표를 다시 사고 나서 내 계좌에 찍힌 금액, 그러니까 내 전 재산은 3만 원이었다. 인천공항에 내려서 경기도 본가로 돌아갈 교통비만 남겨 놓은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비행기 표는 원래 일정보다 이틀 늦게 출발하는 티켓이었다. 지금이야 '겨우 이틀'이라고 느껴지지만 그때는 '이틀만이라도 더.. 있고 싶어..!'의 간절한 마음이었다.
마지막 여행지는 배낭 여행자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태국 북부 마을의 빠이였다. 빠이에서 만난 동행들과 이틀 동안 밤을 새우며 찐한 여행을 했다. 그 이틀 동안의 시간은 금보다 귀했다. 단 한 번도 비행기 표를 찢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가능하다면 태국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면서 눌러살고 싶을 정도였다.
2014년 12월 13일, 떠나는 날이 왔다. 다시 혼자가 되어 방콕 수완나폼 공항으로 향했다. 밤 비행기 스케줄이라서 주변은 이미 어두컴컴했다. 분명 한 달 전 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혼자 한 달 동안 여행을 잘할 수 있을까?', '무서운 사람들을 만나면 어떡하지?'와 같은 두려움과 걱정뿐이었는데, 이제는 정반대의 문장들로 내 머릿속이 가득 찼다.
'한 달 동안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 모두.. 다! 너무너무 좋은 사람들이었어..!'
'아.. 정말 너무 즐거웠고, 행복했다..'
'꼭 다시 와야지!'
'아 근데 정말............. 너무너무 진짜 떠나기 싫다...'
한 달 동안의 여행으로 이미 내 뇌와 마음은 말랑말랑 해진 상태였다. 거기에 마지막 날, 밤 비행기라니.. 이건 여행에 푹 빠져버린, 여행뽕 최고 수치에 달하는 여행병 말기 환자에게 너무도 가혹했다. 곧 이곳을 떠날 생각을 하니 왼쪽 가슴이 욱신거려 왔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본능적으로 나는 다이어리를 꺼냈다. 공항 구석 자리에 앉아 지금 느끼는 감정들과 생각들을 급하게 글자로 쏟아냈다.
넘쳐버리는 감정들은 글자로 쏟아내는 걸로는 해결되지 않았는지 눈가가 뜨거워졌다. 눈물이 쏟아졌다. 이 눈물의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이곳을 떠나기 싫었다. 여행이 너무 좋았다.'
이뿐이었다.
평소에 나는 잘 울지 않는다. 아무리 친한 친구 앞이라 해도 눈물은 보이지 않는다. 감성적이긴 해도 감정적이지는 않은 편이라 감정 조절은 잘해왔다. 어렸을 때부터 작은 욕구들을 잘 참아와서 그럴까. 10대 때부터 성인이 된 후에도 스스로 통제를 곧잘 해왔다. 나는 그게 뭐든 참는 것이 익숙하고 쉬운 사람이었다.
그런 내게 이 눈물은 정말 특별했다. 눈물이 나는 이유는 간결했고 명확했다. 이 눈물은 슬픈 눈물이 아니라 나의 '순수한 욕구'로부터 나온 '첫 눈물'이었다. 아까부터 욱신거리던 가슴은 여행에 푹 빠져버린 뜨거운 사랑을 감각한 것이었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마음속에, 공책 위에 이 말을 새겨 넣었다.
"다음에는 여행이 지겨워질 때까지, 여행만 해보자!"
내가 그토록 가지고 싶고, 느끼고 싶었던 참아지지 않는 마음을 드디어 찾은 순간이었다.
오로지 '나'만으로 나를 가득 채웠던 순간은 그때,
태국을 떠나던 날 밤의 공항이었다.
태국 밤 공항에서 눈물을 흘리던 날로부터 2년 뒤,
나는 지겹도록 여행을 하기 위해 세계여행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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