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된 방랑_세계여행] 북인도 라다크는 내게 첫사랑이다.
[중독된 방랑_세계여행] 북인도 라다크는 내게 첫사랑이다.
"지금까지 갔던 곳 중에 인생 여행지는 어디야?"
장기 여행을 하는 중에도, 여행이 끝나고 나서도 정말 자주 받았던 질문이다.
이 질문을 받으면 나는 곧이어 상대에게 답 대신 질문을 한다.
"꼭 한 곳만 골라야 해?"
1년 넘게 세계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닌 사람에게 하나의 인생 여행지를 꼽으라는 말은 너무 가혹하다. 질문자의 아량이 넓은 경우 2~3개의 여행지를 말할 수 있기도 하지만, 끝까지 '꼭! 단 한 곳만!' 이야기해 달라는 단호한 질문자도 있다.
기억은 제멋대로 저장되고, 또 변하기 때문에 저 질문에 대한 답은 일정하지 않다. 기억에 따라 기분에 따라 조금씩 내 인생여행지는 바뀐다. 그럼에도 80~90%의 확률로 빠지지 않고 말한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인도. 인도 중에서도 북인도, 라다크 지역이다.
세계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인도'라는 나라는 내게 숙제 같은 곳이었다. 뭐랄까. 순도 100% '너무 가고 싶어!'의 마음은 아니었다. 여행자들 사이에서 극과 극으로 호불호가 나뉜다는 인도가 궁금하기도 했고, '왠지 세계여행자라면 인도는 다녀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했다. 이왕 인도를 갈 거면 제대로 여러 지역을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6개월 여행 비자를 받아놓았다.
세계 여행을 시작한 지 100일이 됐을 무렵, 동남아 일주를 마치고 인도 델리에 입성했다. 그때는 8월 중순이었는데 북인도 라다크로 가는 육로길이 열리는 시즌이었다. 라다크 지역은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높은 도로이기 때문에 날씨의 영향을 받아 도로가 닫히기도 하고, 국경지역이라서 때에 따라 길이 막힌다. 그래서 인도 여행을 가더라도 북인도 라다크 지역은 여러모로 타이밍이 잘 맞아야 여행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다른 운은 몰라도 여행 중에 날씨운, 축제운, 시기적절한 운(?)은 타고난 운 좋은 사람이다. 시기적절하게 8월이라 북인도 육로도 열려 있었고, 주변 국가와 관계가 크게 나쁘지 않을 때라 위험한 상황도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인도에 입국하자마자 뉴델리 공항 입국 날짜까지 똑같은 동행 P를 운 좋게 만나게 됐다. P는 당시 대학원생으로, 2주 동안의 북인도 여행을 하기 위해 나왔다고 했다. 어쩜 여행 루트도 나와 딱 맞았다. (이후로 P는 나의 북인도 여행의 시작과 마지막을 함께 하게 된다.)
라다크의 가장 큰 도시인 '레(Leh)'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비행기를 타고 델리 공항에서 레 공항으로 가는 방법 (1시간 소요), 두 번째는 버스를 타고 델리에서 마날리 (15시간 소요)까지 이동 후 -> 차를 타고 마날리에서 레까지 가는 방법 (추가로 18~20시간 소요)이 있다. 레는 해발 고도 3,500m가 넘는 고산 지역이기 때문에 다녀온 사람들은 육로로 가면서 천천히 고산에 적응하는 게 좋을 거라고 추천해 줬다.
그래서 P와 나는 델리에서 마날리로 가는 슬리핑 버스를 탔다. 참 사람 인연이라는 게 얼마나 신기한지 마날리로 가는 버스에서 3명의 한국 여행자를 만났는데 그분들도 모두 라다크를 가기 위해 마날리로 간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 다섯 명은 자연스럽게 마날리부터 북인도 라다크까지 쭉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다.
마날리에서 레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생사를 넘나드는 길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포장도로를 생각하면 안 될뿐더러, 레로 가려면 해발고도 5,000m가 넘는 도로를 지나가야 한다. 물론 도로 옆에 가드레일 따위는 없다. 레로 가는 길은 월미도 디스코 팡팡을 타면서 운전기사가 잠깐 딴생각을 하면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곳이다. 그 도로 위를 18시간 동안 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미 창밖에는 굴러 떨어진 차들이 여러 대 보였다..)
운전기사님 운도 좋은지 안전하게 운전을 잘해주신 덕분에 무사히 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마 많은 여행자들이 라다크 레 지역을 오는 이유는 판공초 호수를 보기 위해서 일 것이다. 영화 세 얼간이 엔딩 장면에 나와 더욱 유명해진 판공초는 수많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버킷 리스트로 꼽힐 정도이다. 이틀 정도 레에서 고산 적응 시간을 갖고, 우리도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판공초 + 누브라벨리 4박 5일 지프 투어를 떠났다.
레에서 지프차를 타고 6시간을 달려가니 판공초가 눈앞에 나타났다. 원래 어떤 것이든 기대가 크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판공초는 달랐다. 여느 영상, 사진으로 본 것보다도 실제로 본 판공초는 어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멋졌다. 단순히 '멋있다. 아름답다'라는 표현보다는 '신비롭다'라는 표현이 더욱 어울릴 것 같았다. 함께 여행했던 친구들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계속 "우와..... 진짜 멋있다..."를 연발했다.
낮에 판공초 모습에 끝없이 감탄했지만 또 우리는 밤에도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수많은 별빛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은하수를 이렇게나 선명하게 본 것도 태어나 처음이었다. 4,000m가 넘는 고도 위에서 바라본 하늘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어찌나 하늘에 별이 빼곡하게 가득 차 반짝이는지 밤하늘이 검은색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였다. 반짝이는 하늘을 조금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여기저기서 별똥별이 떨어졌다. 그때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소원을 비느라 바빴다.
내가 라다크 지역을 인생여행지라고 꼽은 가장 큰 이유는 이렇듯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신비로웠던 풍광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함께 했던 사람들 때문이다. 우리는 애초에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던 사람들이었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미리 짜놓은 것처럼 모든 게 다 잘 맞았다. 5명의 여행 일정부터 여행하는 스타일, 개개인의 성격까지.
아무리 장기 여행을 하게 된다고 해도 이렇게 2주 동안 긴 이동과 더불어 하루 온종일 같이 잠까지 자면서 단체 생활을 하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이렇게 내내 붙어있으면서 단 한 번도 불편한 일이 없었다는 것 또한 드문 일이다. 그 드물고, 드문 일을 나는 북인도 여행을 하며 이들과 함께 했다. 이들과 함께 여행을 할 때 나는 많이 웃었고, 정말 행복했다.
이 북인도 여행이 끝난 후에도 내 여행은 약 1년 정도 더 지속되었고 수많은 인연들을 길 위에서 만났었다. 물론 그중에는 아직도 연락하며 지낼 정도로 각별한 인연도 있지만 여행을 하면서 내가 온몸의 세포가 모두 다 열렸던 적은 북인도가 유일하다. 또한 길 위에서 셀 수 없는 이별을 맞이했음에도 이들과 헤어질 때만큼 뜨겁고 긴 눈물을 흘려본 적은 없다.
나의 세계여행 중에서 라다크는 '첫사랑'같은 존재이다. 라다크를 떠나고 나서 그때를 한참 그리워했었다. 원래 사랑 속에 홀로 남겨진 사람의 시간은 가장 느린 법. 국경을 넘고, 장소와 사람은 계속 변할지라도 오랫동안 라다크의 기억 속에 살았었다. '라다크'를 떠오르면 바로 나는 '그립다'라는 말을 뱉었다. 진심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인도'라는 특수한 장소가 내게 준 긴장감과 설렘, 태어나 처음 보는 자연환경과 풍경이 준 아름다움을 넘은 경이로움, 그 속에서 만나 같은 곳을 향해 갔던 인연들이 준 동질감과 안도감이 황금레시피처럼 아주 적절히 섞였던 것 같다.
이렇듯 한 사람에게 첫사랑 같은 '인생 여행지'로 남기 위해서는 온갖 타이밍이 다 맞아야 한다. 날씨만 좋아서도 안 되고, 풍경만 좋아서도 안 되고, 사람만 좋아서도 안 된다.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처럼 모든 상황들이 딱딱 맞아떨어져야 여행 속에서도, 여행이 지나고 나서도 그 순간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예전에는 어떤 장소, 때, 사람 옆에 '그립다'라는 말을 할 때 슬펐다.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다.
그립다는 말의 또 다른 뜻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최고의 순간이다.
그러니까 다시는 오지 않는, 단 하나뿐인 순간이 내게 왔다는 것은 슬픔보다는 기쁨의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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