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된 방랑_세계여행] 파키스탄 훈자 마을 사람들에게 받은 따뜻한 공격
[중독된 방랑_세계여행] 파키스탄 훈자 마을 사람들에게 받은 따뜻한 공격
세계 여행을 준비하며 나처럼 대충 계획을 짠 사람도 없을 것이다. 1년 넘는 세계여행을 하면서 나는 꼭 가보고 싶은 2~3 곳 정도만 찾아놓았었는데 그중 하나가 파키스탄 훈자 마을이었다. 그 당시 나는 훈자에서 할 수 있다는 히말라야 K2 산맥 트레킹이나 훈자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설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흥은 크게 없었다. 내가 훈자 마을을 이번 여행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호기심'이었다.
훈자 마을은 많은 장기 여행자들 사이에서 '블랙홀'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다고. 특히 훈자 마을과 관련된 여러 여행기를 읽다 보면 하나같이 훈자에서 만난 사람들은 너무 친절하고 따뜻해서, 그 마음을 잊을 수 없어 다시 오게 되는 곳이라고 했다. 솔직히 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어떻게 마을 사람들이 다 친절할 수가 있지? 그냥 글 쓴 사람들이 운이 좋았던 거 아닐까?" 하는 의심 가득한 마음이 컸다.
함께 동행했던 H언니와 나는 훈자에 도착하고 하루, 하루 훈자의 매력에 젖어들고 있었다. 훈자를 가기 전 설산 사진을 봐도 뜨뜻미지근했던 나는 어느새 온 마을을 휘감고 있는 설산을 볼 때마다 가던 길을 멈추고 감탄을 하느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훈자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바로 음식이었다. 아무래도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해서 식재료도 다양할 수 없었고, 인구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시내 상권은 무척 협소했다. 게다가 오후 5시면 대부분의 식당은 닫았다.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파키스탄식 볶음밥인 브리야니 아니면 카페에서 사 먹는 빈약한 샌드위치가 전부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한식이 절실해졌다.
우리가 머물던 숙소와 가까운 곳에 한식당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아직 개업을 준비 중인건지 제대로 된 간판도 없이 매직으로 급하게 쓴 '아리랑 식당'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그래도 한식 비슷한 거라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식당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가자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자 사장님이 우리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바로, 이 사장님이 훗날 우리의 찐친이 되는, 의심 가득한 나의 마음을 180도 바꾼 '이삭(Essak)'이다.
얘기하다 보니 이삭이는 정말 이 가게를 차린 지 얼마 안 됐다고 했다. 음식도 아직 많이 서툴러서 유튜브에 올라온 한식 레시피를 보고 만든다고 했다. 그래도 신기한 건 워낙 음식 솜씨가 좋은 건지 한식 비슷한 맛이 났다. 무엇보다 훈자에서 무려 '신라면'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아리랑 식당을 자주 찾아갔다.
우리가 밥을 먹으러 가면 이삭이는 항상 옆테이블에 앉아서 말을 엄청 많이 걸어왔다. 특히 '훈자 투어는 어디 어디 가봤느냐', '혹시 너네 이글네스트 가고 싶지 않느냐', '가고 싶다면 내가 친구한테 말해서 싸게 지프차를 구해주겠다.' 등등.. 훈자 관광에 대한 질문을 계속했다. 우리는 이삭의 질문을 훈자에서 사업을 하는 한 사람의 비즈니스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였다. 이삭이 우리를 '친구'라기보다 '고객'으로 대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아리랑 식당에 가서 신라면 2인분을 시켰다. 이삭이는 모락모락 김이나는 (살짝 물이 많은) 신라면을 테이블에 놓고, 자연스레 우리 옆 테이블에 앉았다. 대화는 흐르고 흘러 '이삭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삭은 한국이나 일본으로 나가 자영업 관련된 일을 배우며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훈자의 여행객 중 한국인과 일본인을 자주 만났던 이삭은 특히 한국사람에 대한 기억이 참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파키스탄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나가기 위해 관광비자마저도 받기 어렵다며 우리에게 넋두리를 했다. 그런 이삭의 고충과 그의 꿈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삭이라는 사람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이야기를 나누며 금세 밥을 다 먹은 우리는 이삭에게 훈자에서 '카페 드 훈자'(유일하게 에스프레소 기계로 만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 말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다른 카페가 있는지 물어봤다. 카페 드 훈자는 분위기도, 커피 맛도 좋았지만 매일 가기에는 장기 여행자에게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그 말을 들은 이삭은 곰곰이 생각을 해보더니 우리에게 "잠깐만 기다려봐!"라는 말만 남기고, 갑자기 가게 밖으로 나가 어딘가로 뛰어갔다.
10분 정도 지나 급하게 가게로 뛰어 들어온 이삭은 헉헉 거리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이삭이는 한쪽 팔을 우리 테이블을 향해 뻗더니 주먹을 쥔 손을 내보였다. 그 손 안에는 휴지가 쥐어져 있었고, 그 휴지를 우리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삭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네가 원하는 건 아니지만 이거라도 먹을래?"
돌돌 말려있는 휴지를 펼쳐보니 그 안에는 갈색빛 인스턴트 원두커피 가루가 들어있었다.
그 커피가루를 보자마자 나와 H언니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둘 다 아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마음이었다. 나보다 더 여린 H언니의 두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이 인스턴트 원두커피 가루는 훈자에 있는 작은 슈퍼 마켓에서도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삭이 우리말을 듣자마자 헐레벌떡 뛰어나가 급하게 얇은 휴지 한 장에 감싸 온 이 커피가루는 어디에 가도 구할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이삭이 우리를 반겨주고, 인사하는 것이 단지 비즈니스적인 행동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휴지에 돌돌 말려 가져온 커피 가루를 보고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한 순간에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숙소에서 쉬고 있던 중 이삭에게 연락을 받았다. 몇 분 후 우리 숙소 쪽에 들를 테니 잠시 나오라는 메시지였다. 해가 떨어지면 급격히 추워지는 훈자의 날씨 때문에 언니와 나는 오후 6~7시가 넘으면 방 밖으로는 거의 나가지 않았었다. 우리 둘은 왜 갑자기 이 저녁에 부르는지 영문도 모른 채 오들오들 떨며 우리 방과 멀리 떨어져 있는 숙소 리셉션으로 향했다. 몇 분 뒤 이삭이 하얀 봉지를 든 채로 우리에게 나타났다.
이삭은 "이거 우리 집 농장에서 기른 복숭아야. 아직 덜 익었는데 너네 한번 먹어봐."라고 하며 우리에게 대뜸 봉지를 내밀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 걸까. 오늘 커피에 이어 이삭은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불어넣으려고 작정한 것일까. 사실 오늘 낮에 같이 훈자에서 나는 과일 이야기를 하다가 복숭아를 먹어봤냐는 이삭의 질문에 아직 못 먹어봤다고 했었다. 그 대화를 기억하고 이삭은 자기네 집에서 직접 기른 복숭아를 따서 우리에게 먹어보라고 이 저녁에 찾아온 것이다. 우리는 또 한 번 이삭에게 고마웠고, 그동안 우리가 이삭을 오해했다는 생각에 미안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과 눈으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한국에서도 항상 사람을 잘 믿지 못했다. 돌아보니 나는 타고난 마음이 약하고 무른 사람인 것 같았다. 그래서 관계의 끝에 내 가슴에는 잔 상처와 잔 흠집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어른'이라는 가면을 쓰고 만나는 어떤 인간관계에서든 먼저 온 마음을 다해 믿음을 준 적도, 사랑을 준 적도 없었다. 훗날 상처받고 아파할 내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노심초사하며 그들의 마음을 먼저 살피고 내 나름의 필터를 거쳤다. 그 다음 그들을 바라봤고, 멋대로 판단했고, 그제야 내 마음을 줬다. 이런 비겁한 겁쟁이가 나였다. 하지만 훈자에서 만난 이삭이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달랐다. 그들이 갖고 있는 따뜻한 시선과 마음으로 사람을 바라봤고, 그렇게 대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이솝 우화 중 한 에피소드가 있다. 해님과 바람이 한 나그네의 외투를 벗게 하기 위해 둘이 내기를 한다. 바람이 강하게 나그네에게 몰아붙이지만 그럴수록 나그네는 펄럭이는 외투를 더욱 꽁꽁 싸맨다. 그다음에는 해님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햇살을 나그네에게 지속적으로 비추자 나그네는 외투를 벗는다. 훈자에 있을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겪으며 꼭 내가 그 나그네가 된 것 같았다. 늘 사람에 대해 의심을 품고, 믿지 못하던 나를 무장해제시킨 것은 결국 따뜻함의 연속이었다.
내가 내 돈, 내 시간을 쓰며 고생하는 이 비효율적인 여행이라는 행위에 빠진 이유는 이것이다.
여행은 나란 사람이 마음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란 사람이 이 세상에 무엇을 나누고 싶어 하는지를 알게 해 준 가장 가치 있는 행위였다.
낯설고 두려운 땅 위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나의 맨 마음을 보게 되었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오가는 따뜻함을 갈망했으며, 동시에 이 세상에 그 따뜻함을 나누고 싶어 했다.
그랬을 때 내 마음은 가장 편안했다.
내 마음이 내 것이라고 느꼈던 적이 거의 없었는데, 그때는 내 마음이 내 것 같았다.
★본 브런치 북은 매주 월요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오늘도 제 이야기를 찾아주시고,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글 쓰는 저에게 여러분의 공감과 댓글은 가장 큰 힘과 따뜻함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