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된 방랑_세계여행] 여행을 하면 할수록 여행과 멀어졌던 이유
[중독된 방랑_세계여행] 여행을 하면 할수록 여행과 멀어졌던 이유
세계여행을 시작하고 3~4개월 정도는 그야말로 여행에 푹 빠져 살았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들을 만들었다. 그 안에는 웃음도 있고 눈물도 있다. 그때 나한테 걱정이라고는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내일은 어느 숙소에서 잘까?'가 전부였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흘러 여행을 떠난 지 5~6개월 정도 됐을 때부터 난 무언가로부터 여행을 방해받고 있었다. 그것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걱정과 불안이었다. 첫 번째로 내게 걱정과 불안감을 준 원인은 '돈'이었다. 은행 어플에 들어갔다 나오면 한숨부터 쉬어졌다. 지난 몇 년 간 쥐꼬리만 한 월급일지라도 매달 찍히던 '+ 숫자'가 이제는 하나도 없었다. 내 계좌에 찍힌 건 오직 '- 마이너스' 뿐이었다.
그리고 막상 여행을 하다 보니 여행 전에 대략 한 달에 얼마 정도 쓰겠다고 예상하고 나온 금액보다 초과할 때가 다반사였다. 이전보다 올라간 환율과 물가, 여행이라는 특성상 예상하지 못한 상황 때문에 내 생각보다 지출이 더 커져만 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처음 모은 돈으로 1년 정도 여행을 하려고 했는데, 이대로라면 길어야 8~9개월 정도 여행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다음으로 걱정과 불안의 원인은 '한국에서의 삶'이었다. 세계 여행을 하던 때, 나는 한국 나이로 28살, 만 나이로 27살이었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내 배낭에는 '아.. 한국에 돌아가서 뭐 해 먹고살지..?'라는 무거운 질문이 얹어졌다. 그때 만약 20대 초중반 정도만 됐어도 '뭐 어떻게 되겠지~'싶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행을 다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적어도 29살, 30살이 될 텐데 마냥 모른 채 할 수는 없었다.
그때 당시 나는 단어로 말할 수 있는 꿈이 없었다. '글을 쓰고 싶다.', '책을 내고 싶다.'라는 꿈은 20대 내내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고 살아가고 있었지만 '직업'으로서의 꿈과 연결시키지 못했었다. 불어나는 나이와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보면 한국에 돌아가서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할 텐데 막막했다. 긴 여행을 나오면 여느 여행기에서 읽었던 것처럼 나도 어떤 꿈이나 번뜩이는 사업 아이디어를 찾아낼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여행 중 혼자 있을 때마다 이 고민들은 나를 찾아왔고, 나는 여행에 집중할 수 없었다. 분명 지겹도록 여행만 해보자고 나온 세계 여행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여행에 푹 빠지기보다는 점차 여행으로부터 빠져나오고 있었다. 몸은 인도에 있을지언정, 마음은 서울 빌딩숲 속을 헤매고 있었다.
문제는 이 고민은 해도 해도 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현재 나는 인터넷도 되지 않는 인도 시골 마을에 있는데, 당장 취업 준비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시골 마을 구석구석을 걸어보며 점심 먹을 곳을, 커피마실 곳을 탐색하는 일이었다. 맞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행'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봤다.
'네가 지금 불안하다고 해서 바로 한국으로 들어가서 취업 준비를 할 거야?'
'네가 지금 불안한 이유는 한국에서의 삶이야? 아니면 여행 자금 때문이야?'
'그래서 지금 네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게 뭐야?'
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지금 불안하다고 해서 바로 한국으로 들어갈 생각은 1도 없어.'
'불안한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그중 제일 큰 건 생각보다 빨리 줄어드는 여행자금이야.'
'내가 지금 진심으로 하고 싶은 건 즐겁게 여행하는 거야.'
이제야 뿌옇던 내 마음이 깨끗하게 보였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되긴 하지만 '지금' 나는 여행이 더 하고 싶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돈은 벌면 그만이다. 어차피 여행은 돈을 쓰려고 나온 것. 남은 여행 자금을 아낄 수 있는 부분은 아끼되,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꼭 하자. 그러려고 돈 벌어서 여행 나온 거니까.
그러자 여행 전에 작은 옵션으로 생각만 해두었던 '워킹 홀리데이'가 떠올랐다. 한국에 있을 때는 외국에 홀로 가서 돈을 벌고,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두려웠다. 감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로 여러 나라를 다니며 여행을 하다 보니 아쉬움을 남긴 채 여행을 끝내기는 싫었다. 어느 마음이 더 큰지 알기 위해 내 마음속에 있던 두려움과 아쉬움을 저울 위에 올려놓아 보았다. 올려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게의 추는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무게의 추는 '아쉬움'이었다.
해결된 것은 없었지만 이전보다 훨씬 마음이 편안해졌다. 물론 한국에서의 삶에 대한 걱정은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지금 확실한 것은 아직 여행 자금이 남아 있다는 것, 그 돈은 여행을 위해 모은 돈이라는 것, 그래서 난 지금 여행 중이고 즐겁게 쓰면 된다는 것이다. 그다음, 돈을 다 쓰면 돈을 벌러 나는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갈 거라는 것까지. 아주 명확했다.
여행을 오래 했던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긴 여행을 하다 보면 '나'를 알게 된다고.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 말에 조금 더 살을 붙여 이렇게 말하고 싶다.
긴 여행을 하면 몰랐던 나도 알게 되고, 알고 있던 나를 더 정확히 알게 된다고.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한국에서도 '현재'를 살지 못했던 사람이다.
잡을 수 없는 과거, 혹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살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걱정과 불안이 많다는 것.
원래 잡을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들은 우리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법이니까.
돌이켜보니 내가 여행을 좋아했던 이유, 여행에 푹 빠져 세계 여행을 떠나자고 결심한 이유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나는 여행 속에서 유일하게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눈에 보이는 현재'를 살았다.
그때 나는 매 순간을 감각했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며 그 감각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행복했던 것이다. 너무 행복해서 걱정이 될 정도로.
긴 여행을 떠나보니 그제야 보였다.
여행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잡을 수 없는 과거, 혹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사는 사람이더라.
한 달 남짓한 여행이 나를 바꿨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대로였는데.
맞다.
정말로 내가 바꾸고 싶었던 것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나는 그저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이고 싶었다.
한국을 떠난 지 200일이 지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원래 알고 있던 나 자신을, 더불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그 후 여행한 지 9개월이 지났을 때 즈음, 나는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로서 호주 땅을 밝게 된다.
★ 본 브런치 북은 매주 월요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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