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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하는 슬기 Oct 08. 2024

낯선 길 위에서 만난 날 닮은 사람

[중독된 방랑_세계여행] 사랑이었을까. 그리움이었을까.

[중독된 방랑_세계여행] 사랑이었을까. 그리움이었을까. 




세계 여행 중 엄마와 통화를 할 때면 대뜸 이런 질문을 하셨다.


"요즘 만나는 사람은 없고?"


한국에 있을 때도 엄마, 아빠 모두 내게 단 한 번도 물어보지 않은 질문이었다. 부모님과 사이는 좋은 편이지만 연애 사업에 있어서 만큼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건 20대부터 내가 가지고 있는 나만의 철학이다. 결혼할 사람 아니면 부모님께 굳이 말하지도, 보여드리지도 말자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 중에 엄마가 넌지시 내 연애에 대해 물어볼 때 상당히 낯설었다. 


나중에 모든 여행이 끝나고 나서 엄마랑 둘이 대화를 하다가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여행 중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같이 한국으로 돌아오거나 그 나라에 정착을 해서 살 줄 알았다고 한다. 내가 여행을 이렇게 많이 좋아하는 성향인 만큼 비슷한 사람을 여행길 위에서 만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사실 나도 그런 꿈을 안 꾼 건 아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 비슷한 미래를 만들어 가는 꿈.. 하지만 나에게는 정말 '꿈'으로 끝났다. 


장기 여행 중 내 연애를 돌아보면 음.. 뭐랄까. 조금 애매하다. '썸'은 꽤 있었던 것 같은데, 부모님은 고사하고 주변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 연애해!"라고 말할만한 관계는 없었다.  그렇다고 지난 여행길 위에서 만난 인연들과의 시간이 한없이 가볍지는 않다. 당시 우리의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정식적으로 '우리 1일!'이라며 사귀지는 않았을지라도 마음을 줬던 이와 헤어질 때는 이별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이중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기억 속에 남았던 사람이 있다. 


그를 처음 보던 날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11월의 네팔 포카라였다. 혼자 저녁을 먹고, 어두컴컴해질 때까지 주변 산책을 하다가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갔을 때였다. 1층 로비에는 내 또래로 보이는 한국 남자 1명, 한국 여자 1명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로비에 들어가자 앉아있던 분들은 내게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해왔다.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고 나도 소파에 앉았다.


남자분은 딱 봐도 여행을 오래 한 사람 같았다. 검게 그을어진 피부와 다 해진 배낭, 그리고 오랜 시간 여행을 한 사람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가 한눈에 보였다. 그는 지금 막 이 숙소에 도착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자리에 같이 있던 여성분은 동행이 아니라 각자 오신 분이었고, 로비에서 만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았다고 했다. 


반가웠다. 나도 그 게스트하우스에 머문 지 2일뿐이 되지 않았었다. 그리고 이전에 인도에서부터 네팔까지 함께한 동행들은 모두 그 도시를 떠난 상태였다. 사실 동행들을 떠나보내고 헛헛한 마음에 페와호수를 바라보며 혼자 맥주 한 잔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꿰뚫었는지 그때 남성분께서는 괜찮으면 다 같이 가볍게 맥주를 마시는 게 어떻냐고 물어왔다. 그날이 그와 만난 첫날이었다. 



바로 이날이었다. 샌드위치에 혼자 생맥주 한 잔하며 해지는 페와호수 바라보며 고독을 삼켰던 날.



세명으로 시작된 맥주 자리는 어쩌다 보니 총 다섯 명이 됐다. 그 숙소에서 머물던 또래 여행자 친구들이 하나, 하나 자리를 채우면서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졌다. 다섯 명 중 세명은 네팔 히말라야 등반을 위해 여행 온 친구들이었고, 나와 그 사람만이 장기 여행자였다. 그 사람은 나보다 여행을 시작한 지 꽤 오래됐었다. 그리고 이미 여러 나라에서 워킹 홀리데이까지 한 친구였다. 처음 봤을 때 베테랑 여행자의 여유를 괜히 느낀 것이 아니었다. 


그날 함께 맥주를 마시며 노래를 들었는데, 우리는 돌아가면서 자신이 원하는 노래를 휴대폰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가 3번의 한 번꼴로 나왔다. 그 가수들도, 노래들도 대중적이지 않았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취향의 노래가 계속되자, 나는 친구들에게 물었다.

"이 노래랑, 조금 전에 짙은 노래 추가한 사람 누구예요?" 


"어..? 두 개다 전데요..?!"

그였다. 


그도 놀랐다. 나에게 그 노래를 어떻게 알고 있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눈에는 '반가움'이 선명히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그 도시를 머물며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했고, 그때마다 비슷한 취향 때문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좋아하는 영화, 좋아하는 작가마저 우리는 비슷했다. 게다가 기억하고 싶어서 적어놓은 '대사', '문장'까지 겹쳤다.


비슷한 그와 함께할 때면 너무 편안했다. 긴 말하지 않아도 나의 감정을 이해받는 느낌이었다. 겉으로는 밝은 나에게 다른 사람들은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나의 외로움, 우울함을 그는 알아봤다. 그는 둘이 맥주를 마시며 대화하던 밤,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밝은 모습 뒤에 네가 가진 상처가 느껴지더라. 왠지 네 상처와 내 상처는 비슷한 것 같달까.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 조금 웃길 수 있지만.. 내가 너의 그 상처를 보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내 상처를 이해받는 느낌. 내 우울함과 외로움을 알아달라고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그는 알아줬다. 아니 느껴줬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다. 정말 그가 내 상처를, 여린 내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남몰래하기도 했다. 어쩌면 지구 반대편에서 만난 내 운명이지 않을까란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로를 운명으로 두는 건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떠나야 하는 곳과 그가 떠날 곳을. 어느 날 그는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감정을 내게 부드럽고 다정한 언어로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우리의 끝이 정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래도 나는 너에게 갖고 있는 진심을 참고, 숨기고 싶지 않아. 많이 좋아해."


어쩌면 나는 나와 비슷한 사람을 기다렸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사람이 나와는 다른 사람이길 바랐는지 모른다. 나와 정말 비슷한 사람이었다면 저렇게 용기 있는 말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늘 그랬듯 감정을 참고, 숨기려고 했으니까. 사실 내 마음이 어떤지 잘 들여다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내가 그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을 들여다볼 용기마저 없었다. 내가 그를 좋아할까 봐. 혹여나 사랑일까 봐 두려웠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끝까지 나다운 선택을 했다. 눈에 보이는 이별을 두고 어떤 단어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관계를 시작할 수 없었다. 나는 모두 다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다가올 이별이 겁이 난다고, 두렵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함께 이 도시에 머무는 동안만이라도 잘 지내보자고 말했다. 


호수 건너 보이는 설산이 당연한 배경이 될 때까지 머물렀던 포카라. 


바다 같던 페와 호수. 호수의 물결을 바라보며 한 없이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 참 닮았었다.


그 고백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그 도시를 떠나는 날이 정해졌다. 그는 자주 넓디넓은 호수를 보며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를 보고 분명 웃고 있었지만 두 눈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이별을 앞두고 나를 바라본 표정은 낯익었다. 나의 것과 너무도 닮아 보였다. 


내가 떠나는 날, 우리는 늘 그렇듯 아주 비슷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버스에 올라타기 전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나는 그에게 말했다. 

"잘 지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진심으로 고마워."

그는 답했다.

"내가 더 고맙지. 난 정말 네가 잘 지냈으면 좋겠어. 많이 웃었으면 좋겠어. 넌 좋은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 많이 만날 거야. 잘 가. 보고 싶을 거야." 


끝까지 우리는 서로의 행복을 바라는 비슷한 마음으로, 이별을 받아들였다. 




언젠가 책에서 봤던 문장이 생각난다.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나와 비슷한 사람을 그리워한다고.


이전엔 몰랐다. 

비슷한 서로를 이해하니 서로를 더욱 깊게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나와 비슷한 그의 상처, 우울, 외로움을 모두 사랑하기에는 내 마음이 턱없이 좁고 연약했다.

아마 그의 마음 또한 같지 않았을까.


그래서일까.

지금 돌아보면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를 닮은 누군가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 그 안도감이 참 좋았던 것 같다.

나와 비슷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참 달았다.

그리고 그 눈빛은 여전히 그립다.



내게 많은 인연과 추억을 선물해 줬던 포카라는 사무치도록 그립다. 





★ 본 브런치 북은 매주 월요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오늘도 제 이야기를 찾아주시고, 끝까지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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