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과 정착 사이]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로서의 삶, 호주 워킹홀리데이
[방랑과 정착 사이]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로서의 삶, 호주 워킹홀리데이
주변에서 말로만 듣던 여섯 글자, '워 킹 홀 리 데 이'
이것이 내 것이 될 줄은 몰랐다.
세계여행을 떠났을 때만 해도 내가 워킹 홀리데이를 갈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여러 나라 여행은 많이 해도 진짜로 워홀을 갈 거라고는, 그것도 29살에 워홀을 갈 거라고는 더 상상하지도 못했다.
2018년 1월 말 즈음 눈 떠보니 호주 브리즈번 공항이었다. 그때 딱 겨울 휴가 시즌과 겹쳐서 가장 싼 비행기 티켓을 산다고 마지막 여행지인 네팔 포카라로부터 48시간이 걸려서야 호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국 떠난 지 8~9개월이 지나 도착한 곳이 호주라니. 그것도 여행하러 온 것이 아닌 돈을 벌러 온 것이라니.
내가 브리즈번 공항에 도착하던 날, 나를 데리러 온 이가 있었다. 바로 세계 여행 중 인도에서 만난 H. H는 인도 게스트 하우스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친구였다. 당시 H는 호주 워홀 중에 잠시 인도-네팔 여행을 나왔다고 했고, 곧 다시 호주로 일을 하러 돌아간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호주 워홀 비자를 받아놨다고, 통장이 텅장이 되면 호주로 갈 예정이라고 말했었다. 그러자 H는 자신이 다녔던 공장이 호주 내에서 손꼽히게 큰 야채 공장이라며, 페이도 괜찮은 편이고 *세컨드 비자를 딸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원한다면 공장에 일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세컨드 비자 : 호주 정부가 지정한 작은 도시의 농공장에서 총 3개월 동안 근로를 하면 호주에서 1년 더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생활할 수 있다.
이런 행운이 있을까. 호주에 아는 사람도, 아무런 정보도 없던 내게 호주에서의 공장을 소개해준다니. 그것도 세컨드 비자를 딸 수 있는 곳으로! 그때 내 계획은 처음 1년 동안 빡세게 호주에서 돈을 번 다음, 2차 세계여행을 떠나려고 했다. 그 후에 세컨드 비자로 다시 호주로 돌아와서 돈을 번 다음 여정을 정하려고 했었다.
시기는 물론이고 내 상황에 딱! 필요한 일자리를 인도 여행 중 만난 H 덕분에 받게 되었다. 게다가 H는 호주 미아이던 나를 브리즈번 공항으로 데리러 오고, 은행 계좌 개설, 휴대폰 개통 등 필요한 것들을 모두 할 수 있게 도와줬다. 마지막까지 공장까지 손수 데려다주고, 공장 친구들에게 인사까지 시켜줬다. H는 나의 구세주이자 천사였다.
그 공장은 호주 내에서 식품 회사로는 손꼽히는 대기업의 것이라고 했다. 공장 내의 주요 스텝들은 대부분 호주 현지인이었고, 대부분의 공장 노동자는 한국인이었다. 공장의 위치는 그야말로 '시 골'이었다. 우리나라의 시골을 생각하면 안 된다. 가까운 슈퍼에 가려면 차를 타고 20분을 가야 했다. 말 그대로 숙소 주변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덕분에 밤이 되면 별과 달이 엄청 밝게 보인다.)
한국에서 다양한 아르바이트는 많이 해본 편이었지만 공장은 처음이었다. 이 공장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일을 더 주거나, 덜 주거나를 결정 했다. 손이 빨라야 많은 작업을 빨리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손이 느리거나 일센스가 없는 사람은 일을 주지 않았다. 이곳이야말로 철저한 능력중심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 장점 중 하나가 손 하나만큼은 빠르고, 또 눈썰미가 좋아서 손으로 하는 일을 빠르게 습득한다는 것. 어쩌면 야채 공장에 최적화 됐던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공장 관계자분들께 일을 잘한다고 인정을 받아서 여러 파트에서 일을 주셨고, 내 목표이던 '돈'은 꽤 잘 벌었다.
하지만 공장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야채 공장이라서 작업하는 모든 야채에 농약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냉장 시설 안에 들어가 하루 평균 12시간, 길게는 16시간 동안 일을 했었다. 그러다 보니 얼굴에는 농약 때문에 울긋불긋 트러블 생겼고, 오랜 시간 추운 곳에 서서 일을 하느라 다리와 허리 통증을 달고 살았다. 자다가 통증 때문에 깨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하나 더, 가장 힘든 점은 단체 생활이었다. 일단 한 방에서 3명이 지냈고, 한 집에는 10명~12명이 같이 살았다. 먹고, 자고, 일하는 시간 모두 한시도 빼놓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한 나에게는 무척 힘든 생활이었다.
그리고 당시 워홀 비자는 만 30세까지 신청이 가능했기에 만 28살이던 나는 무리 안에서 친구가 없었다. 대부분 23살~25살이었다. 동생들과 사이도 좋았고, 잘 지냈지만 외로웠다.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었다. 단순히 나이의 문제라기보다 비슷한 결의 사람이 없었다. 공장에서의 생활은 겉으로는 바쁘고,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마음속은 늘 공허했다.
이러한 단체 생활의 진짜 문제점은 여기 있었다. 함께 지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노동 강도가 워낙 세서 모두들 신체적으로 많이 지쳐있는 상태에, 하루종일 사람들과 같이 생활을 하니 트러블이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평화주의자인 내 성격상 직접적인 사건은 겪지 않았지만 당시 왕언니이던 나를 동생들은 많이 의지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며 남동생, 여동생 가릴 것 없이 늦은 밤에도 나를 찾아왔다. 사실 내 몸하나 건사하는 것도 벅차던 때라 동생들이 부담스러웠다.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끙끙 앓았었다. 하루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꾹꾹 참고, 평화를 위해 동생들을 어르고 달래주는 일뿐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점점 흐르자 나중에는 동생들이 이런 내 마음을 알아줬다. 또 진심으로 나를 많이 좋아해 줬다. 그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늘 나에게 '고맙다고, 언니˙누나 덕분에 공장 생활 잘 견딜 수 있었다고' 말해줬다. 한 명, 한 명 정든 동생들이 먼저 공장을 떠나갈 때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그렇게 울었었다. 참 신기했다. 이곳을 떠나고 싶게 만든 사람도, 이곳에 더 있게 만들고 싶은 사람도 결국 같았다. 여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8개월 넘게 매일 짐을 풀고, 다시 짐을 싸면서 '내일은 어디서 자야 하지?'를 걱정하던 여행자에게 워홀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더 이상 나는 여행자가 아니었다. 이제 나는 '내일은 몇 시 출근이지?'와 같이 어제와 비슷한 오늘을 살아가는 생활자가 되었다.
분명 여행 자금을 벌러 온 워홀이었다. 오기 전에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렵기도 했고, 낯설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하루, 하루 살다 보니 그 하루하루가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매일 반복되는 일과 사람에 치이기도 했고, 또 그 일과 사람에 감동받고, 감사하며 살아갔다. 상상 따위는 필요 없는 세상 어느 곳에 있는 여느 생활자와 똑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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