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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Oct 05. 2024

머리칼이 없는 나날들

낫고, 낳고, 나아가기

장마가 계속되던 날이었다. 퇴근시간과 맞물린 시내버스 안은 축 쳐진 우산을 둘둘 말아쥔 사람들로 빼곡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밀고 밀리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자니 이마에서 땀이 삐질거렸다. 그때였던가? 누군가의 강렬한 시선이 내게 꽂힌 것을 느낀 것이.


시선의 발신자는 내 바로 앞 창가 좌석에 앉은 여자아이였다. 어깨까지 내려온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모아 쫑쫑 땋고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리본으로 정성껏 묶는 아이 엄마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그려졌다. 아이는 나를 그야말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인지, 내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홀린 듯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물음표가 떠오르는 동시에 울리는 하차벨.


‘삐이-’  


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아이의 시선이 내 얼굴이 아니라 바로 머리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마음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런 내 모습이 아마도 아이에게는 신기해 보였을 것이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터번 두른 주인공 같았을까? 어딘가 꿈결 속을 헤매는 듯 알쏭달쏭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아이의 표정을 보며 ‘내가 예쁘고 어딘가 신비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머리카락이 없는 여자로 도심을 걸어 다니는 것은 그 자체로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확실히 머리카락이 없는 남성보다 월등히 많은 시선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어떤 사람은 나를 힐끗힐끗 훔쳐보고,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쳐다본다. 내 나이 또래, 혹은 그보다 젊은 사람들은 내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한 번씩은 슬쩍 쳐다보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아이들의 시선이다. 아이들의 시선은 앞서 언급한 나이 든 사람들과 완전히 다르다. 애써 나를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는 엄마, 아빠와는 달리 내 움직임을 좌로, 우로 고스란히 따라다니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들여다본다. 때로는 저 사람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를 분간하고 싶으나 쉽게 되지 않는 듯한 혼란을 눈빛에서 읽을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호기심을 미처 감출 수 없다. 아니, 감추어야 한다는 것 자체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래서인지 나를 향한 시선이 너무도 적나라하면서도 그 눈빛만은 판단이 내려지지 않은 순수한 호기심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가발을 쓰지 않기로 한 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내게 ‘암’이라는 불운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있을 것이었다. 탈모는 곧 ‘암환자‘라는 사람들의 인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막상 가발을 착용하지 않고 생활하다 보니 그것은 자연스레 사람들의 낙인과 같은 시선을 피해 숨지 않겠다는 저항이 되어갔다. 이 점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oo아, 우리 이번 정거장에서 내려야 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있던 엄마가 귓가에 대고 아이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아이는 시선을 여전히 내 쪽에 고정한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엄마 손을 꼭 잡고 사람들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나는 아이를 최대한 의식하지 않은 척하며 계속 서 있었다. 이윽고 ‘치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출구 쪽으로 고개를 돌린 찰나, 나도 모르게 웃음이 솟았다. 아직도 아이가 사람들의 붐비는 어깨들 사이로 난 여백을 통해 고개를 길게 빼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이도 내리기 전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몇 마디 말이라도 나눈 사이인양 우리는 서로를 향해 인사했고, 아이는 엄마가 펼친 우산 속으로 폴짝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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