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고, 낳고, 나아가기
밤새 나쁜 꿈을 꾸었다. 속이 좋지 않은 나날이 이어진다. 병원으로부터 위장이 다 약해져서 소화가 잘 안 되는 거라는 설명을 들은 터라, 머리로는 이해는 하고 있지만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출렁거리는 속을 달래고 식욕을 끌어올리는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집 근처 식료품점에서 레몬과 생강을 샀다. 항암주사는 이제 절반이 남았다. 앞으로 남은 일정을 어떻게 버텨나갈지 아득하다. 끝 모를 두려움이 올라오는 순간들이 부쩍 잦아졌다.
오늘은 지금 맞고 있는 항암제가 심장에 영향을 준다고 해서 동네의 심장내과에 초음파 검사를 받으러 갔다. 처음으로 스피커를 통해 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지지직' 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심장 박동소리를 듣자마자 떠오른 것은 ‘필사적’이라는 단어였다. 흡사 아기의 심장소리를 듣는 산모처럼 내 심장 소리에 바짝 귀 기울여 본 몇 분간, 나도 모르게 먹먹한 감동에 젖었다. 심장은 처절하게 일하고 있었다. “쭈아압, 쭈아압” 피를 빨아들이고 뿜어내는 소리는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참 열심히 일하고 있네요”
침묵을 깨고 던진 말에, 의사 선생님이 조용히 대답하셨다.
“그렇죠, 누군가가 뛰게 하고 있는 겁니다.”
의사 선생님은 좌심방, 우심실, 심장의 아래와 위를 꼼꼼히 살피며 영상을 보여 주셨고 나는 내 심장을 눈으로도 구경했다. 내 심장은 정상적으로 일을 잘하고 있다는 진단과 함께 삐죽 빼죽한 그래프로 심장 박동이 기록된 종이를 받아 들고 나왔다. 나오면서 병원 벽 이곳저곳 붙은 기사들을 보니 의사 선생님은 겸업 중인 목사님이셨다.
처음 본 내 심장은 가슴 한켠에 아주 자그맣게 붙어 있는 주먹만 한 녀석이었다. ‘왜 이렇게 고맙고 또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걸까…’ 길을 걷는 내내 병원에서 들었던 심장 박동소리의 잔향이 따라다녔다. 나는 내 몸이 이렇게나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러면서도 내 몸의 안과, 밖 모든 부분을 이미 알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반면 생명유지에 꼭 필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심장의 실체를 본 것은 30년 넘게 사는 동안 오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 존재가 기능할 수 있게 애쓰고 있는 '내가 잘 모르는 나의 일부'가 얼마나 많을까. 나의 무지에 아찔하다.
지금도 나의 장 안에 있는 수백, 수천만 마리의 박테리아가 음식을 소화시키고, 영양을 흡수하며, 망가진 세포를 스스로 복원하고, 외부의 공격에 맞서 싸우고 있을 것이다. 뇌하수체가 바쁘게 일을 시작한다. 뇌하수체는 나의 심신 상태를 파악하고, 스트레스 호르몬의 분비를 조절한다. 병원에서 나와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을 감지했는지, 뇌하수체는 부신에게 신호를 보내 긴장 상태를 서서히 풀어주라고 지시한다. 그러자 부신은 천천히 코르티솔의 분비를 조절하며 나의 호흡을 한결 안정적으로 만들어 준다. 허파는 산소를 공급하고, 뇌는 수많은 신호를 주고받으며 내 몸을 조율한다. 그뿐일까, 지금 막 눈앞에 등장한 계단을 오르는 내 엉덩이를 밀어 올리는 허벅지 근육, 발바닥이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힘을 고루 분산시켜주고 있는 열개의 발가락을 느껴본다. 이루 셀 수 없는 요소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나의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 항암을 하다 보면 항암제가 영향을 주는 여러 계통의 의사 선생님들을 두루 만나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림프계, 호흡계, 신경계, 소화계, 생식계… 총 11개의 시스템으로 나뉜다던, 중, 고등학교 시절 내신시험을 앞두고 암기기계처럼 달달 외우던 신체의 계통*이 서로서로 손을 잡고 유기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나는 정신의 것만이 아니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 일어난 수많은 협력이 있어 내 몸은 기능해 왔다. 몸의 안과 밖 모든 부분을 나의 ‘소유’라고 생각해 온 숱한 낮과 밤들은 착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내 몸은 작은 신전이었다. 그 앞에서 경배해야 마땅한. 그렇게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덧 집 앞 골목에 이르렀다. 어느덧 소화가 다 된 모양인지 슬슬 배가 고프다. 배고픔에도 감사함을 느끼는 배부른 저녁이다.
*신체의 11개 계통은 해부학적으로 인체를 기능에 따라 나눈 것으로, 다음과 같다: 1) 순환계: 혈액과 림프액의 흐름을 통해 산소, 영양분, 노폐물 등을 운반함. 2) 소화계: 음식물의 소화와 영양분의 흡수를 담당함. 3) 내분비계: 호르몬을 분비하여 신체의 대사와 항상성을 조절함. 4) 외피계: 피부, 모발, 손톱 등 외부를 보호하고 체온 조절에 관여함. 5) 면역계: 병원체와 싸워 신체를 방어함. 6) 근육계: 움직임과 자세 유지를 담당함. 7) 신경계: 감각, 운동 조절 및 정보 전달을 담당함. 8) 생식계: 종족 번식을 위한 구조와 기능을 포함함. 9) 호흡계: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교환을 통해 호흡을 담당함. 10) 골격계: 신체를 지지하고 보호하며, 움직임의 기반을 제공함. 11) 비뇨계: 노폐물을 배출하고 체액 균형을 유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