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고, 낳고, 나아가기
대서가 지나고 입추가 왔다. 어젯밤에 귀뚤귀뚤 울던 귀뚜라미 소리가 떠올랐다. ‘아차!’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이는 싱크대 안쪽 선선한 곳에 우메보시*가 되기를 기다리는 젖은 황매실을 꺼내야 할 때라는 뜻이다. 내게 우메보시 만드는 법을 알려주신 선생님은 해가 내리쬐는 날들로 이어진 사흘을 ‘대서’ 기간에 확보해 아침저녁으로 매실을 뒤집어 주어야 한다고 일러 주셨다. 장마가 끝난 건가 싶으면 또다시 비를 쏟아붓곤 하던 변화무쌍하던 하늘이 어제부터는 그 유명한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으로 푸르른 하늘에 드라마틱한 뭉게구름을 뭉실뭉실 만들어 내고 있었다.
어제는 경복궁 근처에서 대학선배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통인시장을 들러 싸리나무로 만들어진 나무 채반을 구했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와 담소를 나누는 와중에도 카페 창밖으로 내리쬐는 한낮의 뙤약볕이 아깝게 느껴졌다. 쓸어 담아 두었다가 비가 오는 날 옥상에 풀어놓을 수 있다면! 부질없는 상상이다. 모든 것이 처음인지라 구해야 할 것도 많고 미리 마음먹어야 하는 것도 많다. 하지만 목표는 명확하다. ‘황매실을 말려 우매보시를 만들 것이다!’ 그 한 가지의 목표를 떠올리니, 슬그머니 게으름도 도망을 간다.
오늘 아침엔 드디어 병을 꺼내 그 안에 있는 황매실을 꺼냈다. 며칠 전에 고이 씻어 꼭지 부분을 잘 닦아 좋은 천일염에 절여 두었던 참이다. 우메보시를 만드는 일은 손이 많이 간다. 하지만 그 어떤 명상보다 더 명상적인 활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조차 흐르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소금에 절여진 매실이 터질세라 조심스레 매실 식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하나씩 하나씩, 신성하고 고귀한 어떤 것을 건져 올리는 기분으로 내 손의 감각에 집중한다. 미리 닦아둔 싸리나무 채반에 차례로 둥그렇게 올려놓고는 흐뭇하게 그 광경을 즐긴다. 황매실은 소금에 잔뜩 절여졌는데도 쉬이 터지지는 않았다. 아주 얇은 황매실 껍질이 최후의 탄성을 갖고 그 안의 과육을 단단히 머금고 있는 상태였다. 한 알 한 알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 알알이 누구의 입으로 들어갈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것을 먹은 이들 중에는 이 뜨거운 태양열을 잔뜩 머금어 나날이 말라간 시간을 가늠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큰 감흥 없이 꿀떡 넘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무렴 나는 상관이 없다. 그저 우메보시를 곁들인 음식들을 가운데 두고 소소하게 일어날 만남들이 기다려질 뿐이다.
건강하고 신선한 황매실을 하나하나 주워 수확한 농부에게서 구해, 그것을 하나하나 닦고 말리고, 보글보글 끓인 물에 담가 소독한 병을 마련해 담고, 깨끗하고 좋은 품질의 왕소금을 구해 경건한 마음으로 담아내던 시간들, 그 병을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들여다보며 곰팡이가 생길까 보살피던 시간들, 그리고 밤낮으로 매실 하나하나를 뒤집어 주는 이 시간들은 앞으로의 행복을 ‘예약’하는 것과 같단 생각이 든다. 그 어떤 행위보다 확실한 행복을 보장해 주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가을과 겨울 내내 시원하고 푸르렀던 여름을 떠올리기 위해 청귤청을 담고, 가을에는 무화과를 허브와 졸여 무화과 잼을 만든다. 시나몬 향이 펄펄 나는 짜이를 끓이며 곧 들이닥칠 친구의 반가운 얼굴을 떠올릴 한겨울의 시간들… 이런 것들이 바로 그런 여정일 것이다.
한 여름 뙤약볕으로 가득 찬 옥상 한가운데에 매실을 올려다 두고 집에서 잠시 낮잠을 잤다. 서너 시간이 지나 다시 올라가 매실을 뒤집어보니 채반의 나무살이 매실 바닥에 새겨져 있다. 낮잠 덕택에 얼굴에도 배갯 주름이 새겨져 있다.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우메보시(梅干し)는 일본의 전통 식품으로, 매실(우메)을 소금에 절여 말린 식품이다. 매실을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후, 햇볕에 말려 만든 것으로, 강한 신맛과 짠맛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