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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Oct 17. 2024

하루를 정성되이 달인 보약처럼

낫기, 낳기, 나아가기

입맛이 영 돌지 않는 날에도 끼니를 거를 수는 없었다. 침샘이 말라버린 듯 입안이 까칠한 날에도 아주 조금씩이라도 세끼를 꼭 챙겨 먹으려고 노력했다.  내 먹을 것을  오롯이 내 손으로 만들어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번의 식탁을 차리는 것 만으로도 시간은 훌렁훌렁 잘만 흘렀다.  


침샘이 자극되는 음식이 나올 때까지 먹방 유튜버들의 영상들을 훑어보기도 하고, 서점에 서서 요리책을 들추어 보기도 했다. 요리 사진을 예쁘게 찍어 포스팅하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했다. 그러고도 도저히 속이 미슥거려 먹을 수가 없는 날에는 냉면의 도움을 받았다. 서울의 이름난 냉면집에 도장 깨기 하듯 찾아가 내 입맛에 어떤 냉면이 가장 잘 맞는지 식초와 겨자소스를 첨가해 가며 진지한 자세로 연구했다.  


오늘 저녁은 요리 준비로 두세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두고 천천히 잡채를 만들어 보았다. 남이 만들어 둔 잡채만 먹다가 막상 만들어 보려고 레시피를 찾아보니, 각각의 재료를 모두 따로따로 불리고, 데치고, 볶고, 윤기 나게 섞는 것이 보통 정성으로는 되지 않는 음식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요리에 집중했다. 적적하기만 했던 초저녁 나절이 깨소금 냄새와 함께 평화롭게 흘러갔다. 마지막에 손으로 쓱쓱 버무려 한 입 베어무니, 와! 하고 감탄이 나온다.

식사는 단순히 배를 불리는 행위를 넘어 일상을 받치는 세 개의 기둥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뭘 먹고 싶니?’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렇게 정해진 세끼를 중심으로 하루 일과를 배치했다. 오직 나를 위한 음식을 이렇게나 정성을 들여 준비해 본 것은 생전 처음 있는일이다. 다른 사람의 요구를 듣는 것에는 철저하면서도 정작 내가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무엇이 필요한 상황인지를 듣는 것에는 서툴기만 했던 나로선 이 시간이 정말 중요하게 여겨졌다. 나와 잘 지내는 시간이 소복소복 쌓여갔다.


만들고 보니 꽤 넉넉한 양이다. 마침 옆 동네에 살고 있는 동생이 퇴근길이라기에 동생 집까지 따끈한 잡채를 가져다주었다. 동생과 제부의 저녁식사까지 해결해 주고 나니 하루가 다 갔다. 잡채를 제일 좋아한다는 제부의 말에 마음이 흐뭇하게 차올랐다. 좋은 하루였다. 나를 우선 돌보면 몸을 받치는 척추가 세워지듯 중심이 잡히고, 우선순위가 자연스레 보이는 것 같다. 정성된 하루를 보약처럼 만들어 보냈으니, 내일은 더 수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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