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고, 낳고, 나아가기
고개가 부-웅 하고 공중에 뜨려는 찰나, 화들짝!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본다. 내 옆 테이블의 어깨에 조신하게 스카프를 두른 채로 책을 읽던 중년의 여인이 나를 보며 빙그레 웃는다.
‘어떻게 된 일이지?’
불과 몇 초만에 저 멀리 어딘가에 떠나 있다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다. 정작 나 자신은 떠나는 지도 다시 돌아오는지도 모르는 채 일어난 미스터리 한 일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일까? 가늠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방금 나도 모르는 사이 그를 만났다는 사실이었다.
‘아, 방금 그를 만난 것이 맞지? 정말이지?’
얼굴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충만함에 세상 자애로운 얼굴이 되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이마 위로 떨어져 광대 언저리에 안경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음을 의식한다.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 끝이 보일 만큼 높이 치솟은 건물 위로 뭉게구름이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다.
밖에는 빛이 반사되어 더 희어 보이는 셔츠를 입은 남성들이 삼삼오오 점심을 먹고 오피스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평일 한 낮, 광화문 대로 옆 카페에 앉아 내다본 세상이 새삼 아름다워 보인다.
그와의 만남을 애가 타게 그리워하던 때가 있었다. 미리 '오겠다', '가겠다' 통보하는 법이 없었기에 나는 그를 기다릴 수 조차 없었다. 내가 기다린다는 것이 되려 그를 쫓아버리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기다림이 간절해지면 간절해질수록 그는 어쩐지 더욱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누구나 원하면 그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 왔건만, 알고 보니 그는 모두에게 찾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와달라고 사정하는 사람에게는 특히나 도통 얼굴을 비추지 않는 그였기에 나는 무심해지려 애썼다.
학창 시절 수업시간에는 이제는 좀 떠나 달라 통사정을 해도 그렇게 질기게 날 따라다니곤 하던 그였다. 회사 생활 중에도 점심시간이 갓 지난 오후 서너 시면 꼭 들르곤 하던 그가 어쩐 일인지 한동안 발길을 끊었던 것이다. 그가 시시때때로 찾아오던 일상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궁금했다. 언제쯤 그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일까? 어쩜 내가 영영 그를 보게 되지 못하게 된 것일까 봐 전전긍긍했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랬던 그를 방금 만난 것이다. 이런 식의 만남이 얼마만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건만, 만나서 무얼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우리가 깊게 교류한 모양이다. 그건 어떻건 상관없다. 기억이 나지 않아도 그저 만났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만세를 부르고 방방 뛰고 싶은 기분이다. 좀 더 자주 찾아 달라 부탁해 볼까? 하지만 그는 이미 떠난 지 오래다.
그저, 내 삶에 집중할 뿐이다. 잘 놀고, 잘 먹고, 잘 쉬고 있으면 그는 예고도 없이 찾아와 나를 사로잡고는 조용히 놓아준다. 깊은 숨을 불어넣어주고, 달달한 뒷 맛을 남긴 채 유유히 사라진다. 언제나 그랬듯,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부탁도, 다시 찾아오겠단 약속도 남기지 않은 채.
그는 Mr. Dormir*, 잠이다.
* Dormir 는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로 '잠자다'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