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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Oct 21. 2024

걷다 보면 알게 될 거야

낫고, 낳고, 나아가기

방사선치료를 끝내고 나니 몸의 진액이 모두 뽑힌 듯 체력이 모두 동이 난 것 같았다. 6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주사기에 묶여 진땀을 흘리며 항암주사를 맞던 것에 비하면 방사선실에 누워 기껏해야 2-3분 있다 나오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일 것이라고 만만하게 본 것이 잘못이었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체력으로 침대에 누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과 마음을 원망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평소라면 별일 아닌 것처럼 넘어갈 가벼운 통증(두통이 있거나, 수술한 부위에 미세한 통증이 느껴진다거나 등등)에도 ‘혹시 재발이 아닐까?’ 하며 자다깨어 검색창을 열어보는 날에는 생각이 꼬리를 물어 쉽사리 다시 잠들기 어려웠다. 


넘기기 힘든 밤들을 꾸역꾸역 삼키던 어느 날엔 내 위로 두툼하게 덮인 이불이 꼭 무덤 같아 보였다. 겨울이 다가오며 갑자기 싼득해진 공기 때문인지 온몸이 오싹했다. 꼭 이런 내 상황을 알고 있는 듯, 마침 안나 수녀님이 연락해 왔다. 내게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나타나 반짝이는 목소리로 지혜로운 조언을 아끼지 않는 그녀를, 나는 농담처럼 ‘수호천사’라고 부르곤 했다.  


“하루에 만보씩, 100일을 걸어보는 거야. 무슨 일이든 석 달을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습관이 형성되기 마련이거든.”


마음이 점점 무거워져서, 급기야는 몸을 일으키기도 쉽지 않은 지경이 된 내 사정을 듣고 수녀님이 내려주신 긴급 처방은 ‘100일 동안 만보 걷기’였다. 나는 몇 보를 걸었는지, 그리고 종일 무얼 먹었는지를 기록해 매일 저녁 수녀님께 보내기로 했다. 실제로 함께 걷지는 못해도, 100일이나 되는 긴 나날에 동행해 주시기로 한 수녀님의 제안이 그 자체로도 큰 의지가 되었다.

 

때마침 창 밖은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 불 때나,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는 날이면 끔찍이도 나가기가 싫었다. 수녀님께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미루고 또 미루다 보면 늦은 밤이 돼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날에도 결국엔 걸었다. 과거를 한 걸음 들여다본 날엔 두 걸음 나아가보려 했다. 두려움에 젖어 축축해진 마음을 바삭한 봄볕에 널어 말렸다. 잠시 멈추고 싶을 때엔 멈춰 섰다. 그동안 조금이라도 잘 자기 위해 전혀 입에 대지 않았던 커피를 천변에 걸터앉아 호로록- 마시던 날에는 고여있던 마음에 차르르, 잔물결이 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80일쯤 지나자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눈이 오나 걸어보자.”라고 하셨던 수녀님의 말이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눈이 오나, 살아감을 멈추지 말자.”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지방의 한 고등학교 교사로 막 부임하신 수녀님은 무척이나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가슴에 톡, 하고 와 닿는 짤막한 답장을 보내주시곤 했다. 나는 정말로 안나 수녀님과 함께 걷고 있었다.


‘너 그동안 진짜 애썼다, 이제는 더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존재하는 대로 보이는 것에 대해 담대하기.’

‘그냥 네가 디딘 곳에서 한걸음만 더 걸어봐’


수녀님과 100일 동안 10,000보를 걷는 목표를 세우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구,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져나갔다. 세상이 온통 뒤숭숭 한 와중 수많은 사람들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더 이상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다. 나만 멈추었다 생각했는데, 유례없는 재난으로 세상이 모두 멈추게 된 것이다. 매일 저녁 중앙대책본부가 발표하는 감염자 수와 사망자 수를 보다 보면 전 세계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잠식되어 가라앉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수녀님과 약속한 '만보 걷기'를 하러 옷깃을 여미고 문 밖을 나서는 순간만큼은 침몰하는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 운동화를 신고 나선 집 밖은 언제나 내 상상 속 세계보다 나았다. 재발에 대한 끝 모를 걱정과 두려움이 지어놓은 안개 같은 환상에서 깨어나 발 닿는 대로 걷다 보면 거짓말처럼 하늘이 개이고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나는 것 같았다.


"오늘도 걷길 참 잘했어."


두 시간이 넘도록 걷고 돌아오는 길... 어느샌가 내 몸과 마음에 꼭 맞는 리듬감이 생겨났다. 그때부터는 만보계의 숫자를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콧노래가 새어 나온다. 무언가로 꽉 들어차 빈틈이 없던 정신에 구멍이라도 난 것 같다. 무기력감에 힘들어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안나 수녀님이 내게 그랬듯 반짝이는 목소리로 말하곤 한다. 딱 100일만 그냥 걸어보라고. 무거워서 더 이상 데리고 다니기 힘들어진 마음을 그냥 그 자리에 내려놓고서. 하루하루 걷다 보면 그 마음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나를 보게 될 거라고. 집으로 돌아오는 당신은 조금씩 나아져 있을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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