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고, 낳고, 나아가기
쓱쓱 - 물이 번지는 시원한 그림이 좋다. 물이 많은 그림을 그리다 보면 마음이 낙낙해지는 효과가 있다. 붓에 물을 푹 적시고 팔레트에 물감을 섞는 즉시, 마음이 반응을 한다.
‘아, 살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연거푸, 최소 2년에 한 번은 이사를 다녔는데, 이 물감과 붓들은 끈질기게 내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드로잉북, 물감, 붓을 비롯한 각종 그리기 도구들은 내 방의 다른 가구나 소품들과는 애초에 다른 지위를 갖고 있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도구들을 아주 오랜만에 죄다 꺼내책상위에 배열해 보았다.
대학을 졸업한 뒤로는 그림이라 해봐야 기분 내킬 때 ‘끼적이는’ 정도에 그치거나 가끔 지인들의 부탁이 있을 때나 한 두 장 그렸을까? 이 물감들이 다 내게 필요할리 만무했는데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이삿짐에서 몰아내는 것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늘 끼고 살아왔던 미술 도구들은 나의 일부와 같아서 외국에 잠시 공부를 하러 장기 체류를 할 때도 이 물감은 동생집으로, 부모님 댁으로 잠시 더부살이하다 곧장 내게 돌아왔다.
오늘은 육안으로만 검진을 하는 날이었다. 그냥 병원에 들르기만 했을 뿐인데도 기가 쏙 빠진다. 병원이란 공간이 갖는 장소성이 있으려니 한다. 병원에는 새로 지은 건물이 하나 있는데 지하 3층 벽 한쪽을 서울대학교 내의 미술관과 연계한 전시를 여는데 활용하고 있다. 나는 미술을 전공했지만 벽에 그림을 걸고 전시를 하는 일을 ‘나의 일’로 진지하게 꿈꾸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 탓을 굳이, 삭막하고 시니컬하기 그지없었던 학과 분위기에 돌리고 싶지는 않다. 그냥, 나는 평면 앞에 진득이 앉아 있기엔 너무 가벼운 엉덩이를 갖고 있었을 뿐이다.
그랬던 내가 병원에 드나들면서 가장 위로를 받은 것이 벽에 걸린 이름 모를 작가들(작품에 캡션도 달리지 않은 경우도 많다)의 평면회화들이었다. 질끈 눈을 감고 표적치료 주사를 맞고 난 뒤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때 보이던 파스텔톤의 구름이 그려진 풍경화는 하얀 주사실에 홀로 덩그러니 남은 위로를 건네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어릴 적부터 전시회에 그림을 걸 줄만 알았지, 누군가의 그림을 이토록 순수하게 감상해 본 일이 몇 번 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늘 전시는 내게 의무적으로, 공부하듯이, 진이 빠지도록 생각하게 하는 것일 때가 많았다.
병원에만 머물러 장기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고픈 것이란 ‘자연’ 일 것이다. 그래서 병원 공간 내의 그림은 의미가 깊다. 무심한 듯, 툭, 아무것도 없는 파란 하늘에 몽실한 구름을 손에 닿을 듯 표현한 그림, 흙투성이 지구의 표면을 보여주는 그림, 한여름 초록 숲의 열기가 훅, 하고 뺨에 끼칠 듯 생생하게 표현된 그림이 복도를 따라 걸려 있다. 환자들의 일상에 자신들의 그림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 작가들은 알고 있었을까? 휠체어에 앉은 어린 아들과 그의 엄마가 한 작품 한 작품 걸음을 어렵게 떼어가며 감상하는 모습을 이 그림들을 그린 작가들이 보았다면 정말 기뻤을 것 같다.
병원을 드나들면서 사람들의 가슴마다 남모를 비탄이 넘실거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그림 그리는 사람이, 나아가 시인이, 음악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비로소 알게 된 것 같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내 안에서 울려 퍼진다.
‘너에게 기회를 줘’
어쩌면, 내 글, 내 그림도 이 세상에 필요한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