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고, 낳고, 나아가기
나는 겁에 질려 있다. 빠진 퍼즐이 다시 제 자리를 찾는 것처럼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유유히 내 자리를 찾아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 꼭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치료가 끝나고 시작된 일상은 마음처럼 쉽사리 ‘살아지지’ 않았다. 암은 완치가 없다고 하는데, 매일 언제 재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벌벌 떨어야 하는 것인지. 그냥 이전처럼 다 잊고 살아가면 되는 것인지, 삶과 죽음 가운데 내가 어디쯤 서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치료가 종료된 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지 않았던 나는 병원에서 권장한 표준치료*를 모두 마치고 난 뒤 예상치 못한 벽을 만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한동안 병원에서 계획하고 짜준 시간표 대로 씩씩하게 치료를 모두 잘 끝냈으니 ‘이제는 해방이다!’하고 다시 삶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갈 것 같았는데 말이다.
죽음은 내게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죽으면 별이 된다'던 그 '별'도 아니었고, 철학적 의미의 '무한한 평온'도 아니었다. 죽음은 다름 아닌'이별'이었다. 한 번도 떨어져 본 적 없던 가장 친한 친구들과의 이별,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이별, 지구별을 비추는 따뜻한 햇살과의 이별, 당연한 듯 함께하는 내 몸과의 이별... 암을 경험하면서 새롭게 체감하게 된 죽음은 내게 아주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사건이 되어 있었다. 궁금한 게 생기면 책부터 찾아보곤 하는 나는 늘 그러했듯 죽음 이후의 생에 대한 책을 몇 권 구해 읽기도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답을 하기 전에는 한 발짝도 걷지 못할 것 같은 질문이 꾹 닫힌 철옹성처럼 내 앞에 서 있다.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는 시점은 다가왔는데, 나는 여전히 정답을 한 글자도 쓰지 못한 백지 답안을 들고 문 밖으로 밀려나가는 듯한 심정이다. 병원은 치료가 끝난 환자에 대해 재발의 가능성, 예후 등에 대한 설명까지는 해 주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후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처방은 해 주지 않았다.
‘가던 방향으로 갈 것인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갈 것인가.’
'다른 방향은 어떻게 찾을 것인가?'
다시 복귀한 직장생활을 하면서 분명해진 한 가지는 이전처럼은 살고 싶지도, 살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이구나… 덜컥, 겁이 났다. 진짜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불현듯, 암 치료를 시작하던 때에 K언니가 귀띔해 준 공간이 생각이 났다. 가톨릭 신부님이 오랫동안 운영하고 있는 암 환자들과 가족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언젠가 치료가 다 끝나고 몸을 맡기고 푹 쉬고 싶을 때 한번 가보라던, 언니의 따뜻한 목소리가 다독다독,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듯했다.
그곳에는 일주일 남짓을 보내며 기도도 하고 건강에 대한 강의도 듣는, 암 환자와 가족들을 위한 피정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었다. 몇 차례의 암수술과 항암을 해내고도 오래 살고 계신 할머니도 만났고, 진단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 마음을 졸이고 있는 초보 암환자도 만났다. 직접 대면하지는 못했지만, 그곳엔 호스피스 병동이 있어서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분들도 계셨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을 사람들을 만나니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방향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일정 중 가장 중요한 일과는 역시 미사였다. 매일 이른 아침 신부님의 미사와 강론을 들었다. 울적하고 기운 빠질 것 같지만, 그곳에는 반전이 있었다. 신부님은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유머러스한 입담을 갖고 계셨다. 끼도, 흥도 많으신 신부님은 몇 십 년간 환자들 곁에서 마주했던 일화들을 유머를 섞어 메들리처럼 들려주시며 환자들과 가족들을 시종일관 ‘빵 터지게’ 웃겨주셨다. 환우들은 그 속에 싸인 숨은 잠언과 같은 말들을 간절하게 골라 주웠다.
유재석, 김제동, 코난 오브라이언, 트레버 노아… 기막힌 말재간에 익살스러움을 겸비한 국내외의 소문난 입담꾼과 비교해 보아도 ‘죽음’과 ‘암’이라는 묵직한 두 주제로 이렇게 사람을 웃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신부님의 ‘반전 있는’ 강론 끝에 내가 주운 말은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사는 것입니다"라는 한마디였다. 병기가 어떻게 되었건, 어느 부위에 어떻게 전이가 되었건,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환자이건, 그 보호자이건, 우리 모두의 공통점은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은 그날 이후 나의 갈비뼈가 되어 내 몸속에 자리 잡았다. 그 갈비뼈에 의지해 살점을 붙이고, 배에 힘을 주고, 다시 다리에 힘을 주어 내 발로 또박또박 천천히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의 의지를 그 말 위에 세워 보기로 했다. ‘미리’ 죽지 않기로 했다. 신부님의 그 말은 죽음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본 사람이 어떻게 현재를 받아들이며 살아야 할지에 대한 힌트가 되었다.
"어디까지나 ‘사는 것’에 충실하게, 죽는 순간까지 사는 것입니다.
죽기 전엔 안 죽어요. 일평생 한 번 죽지요. 두 번 죽는 사람은 없어요.
죽기 전까지는 우리 모두 사는 것입니다."
몸에서 항암제가 모두 빠져나갔다는 것을 새로 돋아나는 머리카락을 보며 실감한다. 기다렸다는 듯 우수수 올라오는 얇고 가녀린 머리카락이 솜털같이 보드라워서 손으로 수시로 쓸어보게 된다. 그래, 너는 벌써 나아가고 있었구나, 삶 속으로.
*표준치료는 특정 질병이나 상태를 치료하는 데 있어 의료 전문가들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인정한 치료 방법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오랜 연구와 임상 경험을 통해 안전성과 효능이 검증된 치료법으로, 암 치료의 경우 표준치료에는 수술, 화학요법(항암치료), 방사선 치료, 호르몬 요법 등이 포함될 수 있다.